이태로, 《강대국외교사와 논리》 를 읽다가 쓴 讀中感
에세이나 소설, 시, 칼럼집 같은 책에 익숙하다. 얼마 전에 나온 480쪽짜리 벽돌 같은 책을 펼쳐 들면서, 나는 솔직히 조금 비겁한 독서를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주행하지 않았다. 교수신문 서평과 몇몇 평론을 참고서 삼아, 내가 관심을 둔 대목부터 더듬더듬 읽었다. 체계적으로 설계된 책을 체계 없이 읽는 방식. 이런 독서법은 아마도 저자에게는 무례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 또렷이 보이는 것이 있었다. 이태로 전 대사의 《강대국외교사와 논리―무정부 상태, 보이지 않는 손, 그리고 리바이어던》은 단순한 외교사 개설서가 아니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400년 국제질서를 꿰뚫는 하나의 거대한 문제의식, 곧 ‘무정부 상태의 국제사회에서 인간과 국가는 어떻게 평화를 모색해 왔는가’라는 질문을 일관되게 밀고 나간 사유의 기록이었다.
저자는 국제정치를 지배해 온 두 개의 논리를 대비시킨다. 하나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비견되는 세력균형, 다른 하나는 토머스 홉스가 상상한 리바이어던의 현대적 변용인 집단안보다. 전자는 힘의 균형을 통해 전쟁을 억제하려는 현실주의의 장치이고, 후자는 강대국 협력을 전제로 한 도덕주의적 장치다. 이 두 논리가 빈 체제와 비스마르크 체제, 베르사유와 얄타, 포스트냉전 질서를 거치며 어떻게 시험되고 변주되었는지, 저자는 방대한 고증과 치밀한 논리로 해부한다.
책의 목차만 훑어도 숨이 찬다. 주권국가 질서, 무정부 상태, 세력균형, 집단안보, 전쟁, 중국이라는 거대 질서, 세계국가….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와 대학 졸업 무렵 잠깐 일별했던 외무고시 수험서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용어들이다. 그러나 그때의 도식적인 설명과는 차원이 다르다. 같은 단어인데, 다른 밀도다. 같은 사건인데, 다른 해석이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세계국가’를 향한 인간의 갈망이라는 장기적 전망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주권의 절대성이 흔들리며 유럽연합과 같은 초국가적 실험이 등장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민족주의의 반격이 거세지며 무정부성이 오히려 확장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세계국가라는 이상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다. 이상과 현실, 도덕과 힘의 긴장 속에서 국제질서를 읽어내는 균형 감각이 돋보인다.
중국에 대한 분석도 예리하다. 저자는 중국을 현존 질서를 대체하려는 ‘수정주의자’로 규정하고, 중국몽을 ‘중국적 세계질서’ 구상으로 해석한다. 미·중 경쟁이 격화되는 오늘의 동북아에서 한국이 어떤 전략적 사고를 가져야 하는지, 본문에서는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으면서도 서문에서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다. 한국은 더 이상 닉슨 쇼크에 속수무책이던 약소국이 아니다. 메이저 파워에 근접한 국가로서, 강대국의 논리를 이해하고 활용할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주문이다.
책의 물리적 무게만큼이나 학문적 무게도 묵직하다. 25쪽에 달하는 주석, 140여 권의 참고문헌, 8쪽 분량의 색인. 이 정밀한 장치들은 저자가 30여 년 외교 현장에서 체득한 경험과 학문적 훈련을 한데 엮어낸 결과물이다. 초고의 상당 부분을 덜어내고 압축했을 그 시간과 인고를 생각하면, 480쪽은 오히려 응축된 분량처럼 느껴진다.
나는 퇴임 후 광고와 브랜드에 관한 비교적 가벼운 비평서를 한 권 냈다. 스스로 ‘소프트 리딩’이라 이름 붙였지만, 이 책과 나란히 두고 보니 그 가벼움이 새삼 또렷해진다. 구성의 체계성, 논리 전개의 밀도, 고증의 깊이 앞에서 겸허해진다. 한 분야를 400년의 시간 축으로 밀어붙이는 지적 노동이 얼마나 혹독한지, 이 책은 말없이 증명한다.
책이 잘 읽히지 않는 시대, 책이 잘 팔리지 않는 시대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런 책은 달라야 한다. 반짝하고 사라질 화제작이 아니라, 오래 곁에 두고 참고하고 다시 펼치는 스테디셀러가 되어야 한다. 국제정치가 하루가 다르게 요동치는 오늘, 외교와 세계질서를 깊이 이해하려는 이들에게 든든한 길잡이가 될 책이다.
체계 없이 읽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제 이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무정부 상태의 국제사회에서 평화를 모색해 온 400년의 사유를, 이번에는 저자의 설계도에 맞춰 천천히 따라가 보고 싶다.
이 책은 단지 외교사를 설명하는 책이 아니다. 미래의 평화를 만들어가려는 이들에게 건네는, 묵직한 지적 동반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