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목줄을 끊은 개, 그리고 제국의 배당금

by 연구소장

[천명 외상센터, VVIP 병실 / 심정지 수술 3일 후]


따스한 햇살이 병실 창문을 넘어와 내 얼굴을 간지럽혔다.


천천히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관자놀이를 짓누르던 끔찍한 통증도, 시야를 가리던 붉은 노이즈도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머리가 이렇게 맑고 가벼웠던 적이 언제였던가.


눈앞의 허공에 투명한 시스템 알림창이 떠올랐다.


[시스템 재부팅 완료.]


[체내 나노 머신 코어 네트워크 100% 영구 소실 확인.]


[마스터 권한이 영구적으로 삭제되었습니다.]


[알림: 당신은 이제 이 육체의 유일한 소유자입니다. 자유 의지(Willpower) 상태가 활성화됩니다.]


나는 입꼬리를 올려 피식 웃었다.


빌어먹을 노인네. 이제 당신이 쥔 리모컨은 아무 쓸모 없는 플라스틱 쪼가리가 되었을 거다. 드디어 내 목을 조르던 개목줄을 내 손으로 끊어냈다.


몸을 일으키려 고개를 돌리자, 병실 소파와 간이침대에 널브러져 자고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전술복을 입은 채 깁스를 하고 잠든 백강우, 노트북을 끌어안고 침을 흘리는 민도현, 그리고 내 침대 모서리에 엎드려 쪽잠을 자는 한수진.


눈밑은 퀭하게 파였고 얼굴은 반쪽이 되어 있었다. 내가 사경을 헤매는 3일 동안 단 1초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바이탈을 지킨 것이 분명했다.


'미련한 놈들.'


나는 수액 줄을 조심스럽게 뽑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으음... 회장님...?"


인기척에 가장 먼저 눈을 뜬 건 한수진이었다. 그녀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눈을 비비더니 비명을 질렀다.


"이,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심정지가 왔던 몸이에요! 아직 뇌 손상 여부도 다 확인 안 끝났는데!"


그녀의 비명에 민도현과 백강우도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회장님!! 깨어나셨습니까!"


"호들갑 떨지 마. 너희들이 흉골이 부러져라 심장 마사지를 해댄 덕분에 가슴팍은 좀 뻐근하지만, 뇌는 아주 멀쩡하니까. 몇 개냐, 이거."


나는 한수진의 눈앞에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세... 세 개요. 진짜 괜찮으신 겁니까? 그 나노 머신은...!"


"다 탔어. 내 머릿속에 아버지의 잔재는 1그램도 안 남아있다."


나의 확언에 세 사람의 얼굴에 그제야 안도의 화색이 돌았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백강우가 굵은 눈물을 훔쳤다.


"너희들이 고생이 많았다. 내가 의식 잃은 동안 병원 안팎의 상황은."


"완벽하게 통제 중입니다. 지하에 격리된 VIP(정부 수뇌부)들은 저희가 투여한 필터링 장치 덕분에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송도의 공장도 전면 폐쇄 후 샘플 Z 원액은 전량 소각했습니다."


민도현이 빠르게 브리핑했다.


"좋아."


나는 병실 창문 너머로 천명 재단의 거대한 부지를 내려다보았다.


경찰 장갑차와 바리케이드가 둘러쳐진 난공불락의 요새. 이제 이 성벽 안을 황금으로 단단하게 메우고, 다가올 전쟁을 위해 군대의 사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릴 시간이다.


"도현아. 재단 재무총괄이사 당장 내 이사장실로 대기시키라고 해. 결재할 게 좀 많을 테니까."


[천명 외상센터, 최상층 이사장실]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헐레벌떡 뛰어온 재무총괄이사가 두툼한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천명 바이오를 해체하고 확보한 재단의 가용 현금만 자그마치 30조 원.


"보고는 생략하고 내 지시부터 받아 적으세요."


나는 등받이에 몸을 파묻으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우리 재단 소속으로 이 병원에 남아있는 직원이 총 몇 명입니까?"


"기존 천명 병원 시절부터 남아있던 의사, 간호사, 행정직, 보안팀, 그리고 청소 및 식당 용역 직원들까지 전부 합치면 대략 3,500명 선입니다. 강남역 사태 이후 도망친 인원들을 제외한 숫자입니다."


"생각보다 많이 남았군. 도망치지 않고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이 요새를 지킨 대가는 확실하게 지불해야지."


나는 책상 위의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첫째. 오늘 자정 전까지, 병원에 남아있는 전 직원 3,500명 전원의 개인 계좌로 '특수 위험 수당' 명목의 보너스를 쏩니다. 금액은 직급, 연차, 정규직, 계약직, 용역 따지지 말고 일괄적으로 1인당 1억 원씩 입금하세요."


"네?! 일... 일괄 1억 원이요?!"


재무이사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3,500명에게 1억씩이면 무려 3,500억 원입니다! 아무리 저희 현금 보유량이 넉넉해도, 청소 노동자나 식당 직원분들께까지 1억을 일시불로 쏘는 건 회계상..."


"내 병원에서 피 닦고 환자들 밥해주는 사람들이, 펜대 굴리는 임원들보다 가치가 떨어집니까?"


나의 서늘한 일갈에 재무이사가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건 단순한 보너스가 아닙니다. 앞으로 닥칠 지옥 같은 바이오 테러 속에서, 내 지시 하나에 목숨을 걸고 이 병원을 지켜낼 '군자금'이자 '생명수당' 선지급입니다. 잔말 말고 당장 쏘세요."


"아... 알겠습니다! 즉각 집행하겠습니다!"


"둘째. 1선에서 괴물들과 직접 치고받는 천명 1기생 기동대 100명. 이 녀석들한테는 1인당 5억 원씩 꽂으세요. 그리고 기동대의 개인 방호복과 전술 장비는 미군 특수부대 티어 1(Tier 1) 최고 등급으로 전면 교체합니다. 예산 상한선 없이 가장 비싸고 튼튼한 걸로 싹 다 긁어오십시오."


총 4,000억 원에 달하는 압도적이고 무자비한 현금 살포.


자본주의 사회에서 충성과 안정을 보장하는 가장 완벽하고 확실한 수단은, 그들을 짓누르는 현실적인 공포를 압도적인 자본으로 뭉개버리는 것이다. 1억이라는 현금이 통장에 꽂히는 순간, 도망치려던 직원들도 기꺼이 방호복을 입고 내 방패막이가 되어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기 이 네 명."


나는 방금 이사장실로 들어와 도열한 백강우, 한수진, 박철민, 민도현을 가리켰다.


"이 네 명은 오늘부로 재단 '상임 이사'로 승진입니다. 연봉은 국내 대형 병원장급의 3배로 세팅하고, 각자 담당 구역(보안, 수술, 작전, 연구)에 무제한 법인 카드 발급하세요."


"미... 미쳤어. 진짜 스케일 돌아버렸네."


한수진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박철민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백강우와 민도현의 눈에는 이미 광신도에 가까운 충성심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자, 돈 잔치는 여기까지. 이제 진짜 전쟁을 준비해야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면을 가득 채운 서울시 전도를 노려보았다.


"도현아, 너는 연구총괄이사로서 알파고 할아버지를 사 오든, BSL-4급 연구실을 짓든 네 마음대로 예산 써. 목표는 단 하나, 아버지가 뿌릴 완성형 '샘플 Z'의 항체와 백신을 지구상에서 제일 먼저 만들어 내는 거다. 강남역 감염자들과 송도에서 잡아 온 헬하운드 피 다 뽑아서 분석해."


"명심하겠습니다! 3일 안에 초기 항혈청 양산 라인 구축하겠습니다!"


"철민이 넌 작전이사야. 병원 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구급차와 헬기 정비하고, 장갑차 수준으로 방탄 개조해. 수진이는 중환자실과 수술실 베드 한계치까지 확장하고. 강우 형은 외부 방어선에 콘크리트 바리케이드 2중으로 더 쳐."


폭풍처럼 쏟아지는 지시에 4명의 이사들이 일제히 관등성명을 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병원 1층 로비 및 구내식당]


띠링-! 띠리링-!


병원 곳곳에서 직원들의 스마트폰 알림음이 동시다발적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수술실 청소를 마치고 잠시 쉬고 있던 용역 업체 소속 김 여사는, 자신의 낡은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굳어버렸다.


[입금: 100,000,000원 / 적요: 천명 글로벌 의료 재단 특별 생명수당]


"이... 이게 뭐야. 일십백천만십만... 일억?!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김 여사가 옆에 있던 동료의 팔을 붙잡고 소리쳤다.


"언니도 들어왔어?! 나도, 나도 1억 들어왔어!! 이거 병원에서 진짜 쏜 거야?!"


응급실에서 피 묻은 가운을 빨던 수간호사도, 야간 당직을 서며 컵라면을 먹던 레지던트들도, 바리케이드 앞에서 경계를 서던 사설 보안 요원들도. 모두가 자신의 통장에 찍힌 '1억'이라는 비현실적인 숫자를 보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


병원 전체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강남역 사태 이후 언제 괴물들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공포와, 병원에 갇혀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던 3,500명 직원들의 사기가 단숨에 우주를 뚫고 솟아올랐다.


"회장님 만세! 천명 재단 만세!!"


이제 그들에게 천명 외상센터는 도망쳐야 할 지옥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내야 할 '나의 직장'이자 '최고의 성역'이 되었다. 돈으로 산 충성이라 할지라도, 생사가 오가는 전장에서는 그 어떤 신념보다 강력한 무기였다.


[경기도 가평, 천성전 지하 벙커]


콰아아앙-!!


거대한 대리석 테이블이 박살 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어. 코어가 파괴됐단 말이다! 내 그릇이! 내 완벽한 아담이!!"


휠체어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천무성의 얼굴은 분노로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다 못해 시뻘건 짐승의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송도의 공장이 박살 난 것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평생을 바쳐 빚어낸 완벽한 육체, 천이환의 머릿속에 심어둔 '나노 머신 코어'가 완전히 소멸했다는 사실은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교주님... 진정하십시오. 아직 저희에겐 완성된 '성수(샘플 Z)'가 남아있지 않습니까."


대사제가 바닥에 엎드린 채 덜덜 떨며 말했다.


"진정? 지금 진정하라고 했느냐!"


천무성이 휠체어 손잡이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지이잉-


벙커 한쪽 벽면이 열리며, 거대한 냉동 컨테이너 수십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는 송도 공장에서 미리 빼돌려 둔, 액체 상태의 완성형 '샘플 Z' 원액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강남역에 풀었던 불안정한 테스터 버전과는 차원이 다른, 진정한 악마의 피였다.


"내 그릇이 스스로 목줄을 끊고 오만하게 요새에 틀어박혔다면... 그 요새째로 불태워 재로 만들어주마."


천무성의 쉰 목소리가 지하 벙커를 섬뜩하게 울렸다.


"대사제. 내일 아침, 서울 시민들이 출근하는 가장 혼잡한 시간. 수도권 주요 정수장 세 곳과, 강남, 종로, 여의도의 지하철 환승역 환풍구에 '성수'를 전부 살포해라."


"저, 전부 말입니까?! 교주님, 그 정도 양이면 서울 인구의 절반이 순식간에 괴물로 변합니다! 국가가 완전히 소멸할 수도..."


"국가가 소멸해야 신(神)이 군림하는 법이다!"


천무성이 주먹을 꽉 쥐었다.


"어차피 정부의 윗물들은 전부 내 아들놈의 병원에 갇혀 있다. 서울이 생지옥으로 변하면, 녀석이 자랑하는 그 30조 원짜리 요새로 수백만 명의 괴물들이 몰려들겠지. 녀석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똑똑히 지켜보마."


[천명 외상센터, 이사장실 / 그날 밤]


나는 이사장실의 불을 모두 끈 채, 통유리창 너머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일이면 저 눈부신 불빛들은 피와 불길로 물들 것이다.


아버지는 분명 모든 패를 잃은 분노를, 가장 끔찍한 대량 학살로 표출할 테니까.


"준비는 끝났다."


나는 어둠 속에서 하얀 가운을 벗고, 특수 제작된 검은색 전술 기동복 재킷을 걸쳤다. 내 목숨을 구한 100명의 장수들과, 1억이라는 생명수당에 목숨을 건 3,500명의 군대. 그리고 정부마저 손대지 못하는 완벽한 치외법권의 요새.


"빨리 움직이시죠, 아버지. 당신이 만든 지옥의 한가운데서, 이 괴물 의사가 어떻게 메스로 세상을 도려내는지 똑똑히 보여줄 테니까."


자본과 의술, 그리고 지독한 광기가 격돌하는 진정한 '메디컬 콜드워'가, 서서히 붉은 달빛 아래 막을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30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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