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현대의 이단심문관

by 연구소장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마녀사냥은 결코 무지몽매한 평민들의 우발적인 폭동이나 광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당대의 가장 엘리트 계층이었던 성직자와 법학자, 그리고 영주들이 치밀한 논리와 합법적인 재판 절차를 동원해 만들어낸 완벽한 '시스템'이었다.


권력자들은 흉년이 들거나 전염병이 창궐하여 민심이 흉흉해질 때마다, 그 거대한 분노와 불안을 배출할 비상구가 필요했다. 희생양은 대개 권력의 중심에서 빗겨나 있으면서도 흠집을 내기 쉬운 자들이 선택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고문실의 비명 소리에 귀를 막으면서도, 화형대의 불길이 타오를 때면 자신이 십자가에 묶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기꺼이 횃불을 던졌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우리의 평온한 일상이 유지된다는 그 얄팍하고도 끔찍한 군중의 이기심. 그것이 마녀사냥의 본질이었다.


그리고 21세기. 눈부신 유리와 강철로 솟아오른 대한민국의 빌딩 숲에서도, 그 야만적인 의식은 형태만 세련되게 바뀐 채 여전히 자행되고 있었다. 화형대 대신 '징계위원회'가, 횃불 대신 '사내 공지'와 '익명 게시판'이 그 자리를 대신했을 뿐이다. 수만 명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기업 역시, 겉으로는 첨단 시스템과 합리성으로 무장한 듯 보이지만 그 심연을 들여다보면 봉건 영지나 다를 바 없었다.


태성그룹 본사 22층.


전략기획실 산하 특별감사팀의 서지안 실장은, 그 현대판 이단심문소의 가장 유능하고 우아한 수석 심문관이었다.


새벽 5시 정각. 서지안의 아침은 알람 소리 없이 시작된다.


완벽하게 통제된 생체 시계가 수면의 장막을 걷어내면, 그녀는 암막 커튼으로 빛이 완벽하게 차단된 침실에서 소리 없이 눈을 뜬다. 무채색으로 통일된 최고급 주상복합 오피스텔 내부에는 인간적인 온기를 느낄 만한 생활의 흔적이 전무했다. 감정을 자극하는 가족사진도, 누군가와 나누었던 기념품도 없었다. 오직 흐트러짐 없는 질서와 서늘한 공기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최고급 에스프레소 머신에 스페셜티 원두를 정확히 18그램 갈아 넣고, 섭씨 92도로 세팅된 물을 내렸다. 검고 진한 액체가 잔에 떨어지는 일정한 속도를 가만히 응시하며, 그녀는 오늘 하루 동안 자신이 썰어내고 조립해야 할 인간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체스 말처럼 배열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뇌 구조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그 결이 달랐다. 사람들은 대개 타인과 교류할 때 감정을 섞고 공감을 나누지만, 지안에게 타인이란 그저 '특정한 심리적 자극에 반응하는 유기체'에 불과했다. 슬픔, 기쁨, 두려움, 탐욕. 그 모든 감정은 지안의 눈에 완벽하게 계산 가능한 데이터 값으로 치환되었다.


오전 7시 30분. 지안은 티끌 하나 없이 매끈하게 떨어지는 짙은 네이비색 맞춤 슈트 차림으로 태성그룹 본사 22층에 들어섰다.


특별감사팀 사무실의 공기는 언제나 무겁고 건조했다. 일반적인 감사(監査) 부서라고 하면 대개 먼지 쌓인 회계 장부와 영수증 더미, 복잡한 재무제표의 숫자를 들여다보는 핏발 선 눈동자들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자본의 최전선에서 벌어지는 비리들은 으레 숫자의 오차 속에 그 추악한 민낯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안의 집무실 풍경은 사뭇 달랐다.


미니멀하고 차가운 금속재 책상 위에는 회계 장부 대신, 특정 부서 임직원들의 파편화된 일상 기록들이 정갈하게 파일링되어 있었다. 사내 메신저 접속 및 로그아웃 시간대, 법인 차량의 GPS 동선 기록, 구내식당 식권 결제 패턴, 심지어 부서원들의 연차 사용 내역과 심리상담 센터 방문 횟수까지.


그녀는 돈의 흐름을 좇는 평범한 감사 인력이 아니었다. 지안은 '사람의 그림자'를 좇았다.


미제 사건을 추적하는 노련한 강력계 수사관이 범죄 현장에 남겨진 지문과 혈흔의 궤적, 구두 발자국의 깊이를 분석해 범인의 억눌린 심리와 생활 수준을 프로파일링하듯, 지안은 타겟이 무의식중에 흘린 미세한 흔적들을 해부하는 데 천부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누군가의 진심이 아니라 그가 버린 쓰레기, 그가 즐겨 쓰는 단어의 빈도, 무의식적인 시선의 방향에서 진짜 단서를 찾아내는 법. 그것이 지안의 사냥 방식이었다.


“실장님. 재무팀 송태섭 부장에 대한 2차 내사 보고서 취합되었습니다.”


특별감사팀 소속의 박 과장이 조심스럽게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와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지안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서류의 첫 장을 넘겼다. 빼곡한 활자들을 읽어 내려가는 그녀의 눈동자는 깊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이번 사냥의 타겟. 재무팀 송태섭 부장.


최근 그는 그룹의 실세인 부사장이 역점 사업으로 밀어붙이던 수백억 대의 해외 페이퍼컴퍼니 설립안에 정면으로 제동을 걸었다. 20년간 태성그룹의 금고를 지키며 흠집 하나 없이 재무통으로 살아온 그의 깐깐한 잣대에, 그것은 향후 그룹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명백한 배임 행위였다.


조직의 이익을 지키겠다는 송 부장의 결단은 개인의 도덕성으로 보자면 훌륭한 충정이었으나, 권력의 관점에서는 당장 도려내야 할 썩은 살점일 뿐이었다. 부사장은 눈엣가시가 된 송태섭을 합법적으로 도륙할 사형 집행인으로 서지안을 선택했다.


문제는 송태섭이 지나치게 깨끗한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지안은 지난 한 달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의 삶을 난도질했다. 본인과 친인척의 차명 계좌 조회를 시작으로, 지난 10년간의 골프장 출입 기록, 사적인 저녁 모임, 법인 카드 내역, 심지어 그의 아내가 다니는 동네 마트의 결제 내역까지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송태섭은 지독한 결벽증 환자이자 원리원칙주의자였다. 협력업체에서 보내온 명절 선물 세트조차 반송 처리하는 사내였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옛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돈에 관해서라면 성직자에 가까울 만큼 무결점의 삶을 살고 있었다.


“먼지 한 톨 안 나오는군요. 역시.”


보고서를 덮은 지안이 건조한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박 과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부사장님께서 기한을 이번 주 금요일까지로 못 박으셨습니다. 횡령이 안 되면 법인카드 사적 유용이나, 하다못해 근태 불량으로라도 엮어서 징계위에 회부하라고 압박하시는데… 이 양반은 아침 7시 출근을 10년째 어긴 적이 없습니다. 도무지 빈틈이 없습니다. 무리해서 억지로 숫자를 끼워 맞출까요?”


“아니요. 조잡하게 숫자를 조작했다가 나중에 법무팀에서 꼬투리 잡히면 곤란해집니다. 우아하지도 않고요.”


지안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매혹적인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결백. 그것은 덫을 놓는 사냥꾼의 입장에서 볼 때 꽤나 다루기 쉬운,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였다. 스스로 결백하다고 굳게 믿는 자들은 타인의 악의를 쉽게 의심하지 않으며, 평범한 군중이 생존 앞에서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잔인하게 돌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철저히 무지하다. 그들은 투명한 논리와 원칙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맹신하지만,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불안’이라는 불씨가 당겨지면 그깟 원칙 따위는 한 줌의 재로 변해버린다는 사실을 모른다.


“송 부장 개인의 계좌와 행적 조사는 이제 전면 중단하세요. 덮습니다.”


지안은 책상 위로 몸을 살짝 숙이며, 뱀처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대신, 재무팀 실무진 열두 명. 송 부장 밑에서 수족으로 일하는 그 사람들의 최근 3년 치 인사 평정, 사내 메신저 대화량의 변화, 개인 대출 기록, 부서 내 파벌 구도, 그리고 사내 심리상담 센터 예약 기록까지 전부 취합하세요. 오늘 퇴근 전까지 내 책상 위에 올려두시고요.”


비리를 찾을 수 없다면, 비리를 증언해 줄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하면 된다. 한 사람을 무리에서 영원히 지워버리기 위해서는 그가 부패했다는 확실한 물증보다, 그가 주변을 병들게 하는 ‘괴물’이라는 다수의 합의가 훨씬 더 파괴적인 법이다.


송태섭이라는 단단한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지안이 선택한 무기는, 대포를 쏘아 올리는 무식한 공성전이 아니라 성 내부의 식수원에 소리 없는 독을 푸는 것이었다.


오후 2시 30분, 본사 15층 대회의실 앞 복도.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재무팀의 주간 회의가 한창이었다. 지안은 복도 끝 휴게실의 고급 에스프레소 머신에 몸을 기댄 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텀블러를 만지작거리며 그 풍경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는 회의실 안의 권력 구도와 인물들의 감정선을 투명한 엑스레이처럼 꿰뚫어 보았다.


테이블 상석에 앉은 송 부장은 미간을 깊게 찌푸린 채 결재 서류를 툭툭 치며 무언가를 열변하고 있었다. 입 모양과 굳은 제스처로 보아, 실무진이 올린 보고서의 사소한 수치 오류를 지적하는 중인 듯했다. 그의 훈계는 길고, 꼼꼼했으며, 집요했다. 숫자를 다루는 부서의 특성상 작은 오차가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올 수 있기에 그의 질책은 합리적인 업무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지안의 시선이 머문 곳은 핏대를 세운 송 부장이 아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질책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재무팀 실무진들, 그중에서도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아 볼펜을 쥔 손을 하얗게 떨고 있는 한 남자였다.


이동진 대리.


지안의 머릿속에 어젯밤 외우다시피 읽어 내린 그의 개인 신상 명세가 빠르게 스크롤되었다.


‘34세. 아내의 첫 출산과 동시에 3개월 전 무리하게 주택담보대출을 끼고 신도시 아파트를 매매. 최근 금리 인상으로 인한 이자 상환액이 월 소득의 40%를 초과. 이번 인사고과에서 과장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가계 경제가 치명타를 입음. 평소 위장장애와 만성 피로에 시달림.’


이 대리의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고, 시선은 테이블의 나뭇결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깐깐한 송 부장을 개인적으로 악의를 품고 미워한다기보다는, 그가 내뿜는 완벽주의적인 압박감과 자신의 위태로운 현실에 짓눌려 서서히 질식해 가는 것에 가까웠다.


지안은 이 대리의 굽은 등허리에서 짙은 ‘결핍과 공포’의 냄새를 맡았다. 저 눅눅한 절망과 피로 위에 아주 작은 명분 하나만 던져주면, 그는 스스로 살기 위해 기꺼이 자신이 모시던 상사의 목을 물어뜯을 훌륭한 사냥개가 될 터였다.


회의가 끝나고 팀원들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뿔뿔이 흩어질 때, 지안은 휴게실을 빠져나와 자연스럽게 이 대리의 동선과 교차하도록 복도를 걸었다.


“이동진 대리님.”


벨벳처럼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


자판기 앞에서 캔커피를 뽑으려던 이 대리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구김 없는 슈트, 그리고 공기마저 서늘하게 정화할 듯한 압도적인 존재감. 이 대리는 그 악명 높은 특별감사팀의 서지안 실장이 왜 자신 같은 평사원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먼저 인사를 건네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 네. 실, 실장님. 안녕하십니까.”


“고생이 많으시네요. 방금 회의하시는 거 지나가다 우연히 봤어요. 송 부장님 기준이 워낙 높으셔서 실무진들이 뼈를 깎는다는 소문, 22층 감사팀에까지 파다하거든요.”


지안은 입가에 따뜻하고 이해심 넘치는 미소를 띠며, 자신이 들고 있던 고급 프랜차이즈 카페의 콜드브루 커피를 그에게 가만히 내밀었다.


“이거 드세요. 저보다 지금 이 대리님께 훨씬 더 필요할 것 같아서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실장님 커피를…….”


“받아요. 갓 태어난 예쁜 딸내미 밤새우며 돌보랴, 깐깐한 상사 밑에서 실적 맞추랴, 요새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실 텐데.”


순간, 캔커피를 향하던 이 대리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감사팀 실장이 자신의 개인적인 가정사까지 꿰뚫고, 심지어 윗선의 압박에 시달리는 자신의 고단한 처지를 완벽하게 공감해 주다니. 잔뜩 날이 서 있던 그의 뇌 신경망이 ‘이해와 위로’라는 뜻밖의 달콤한 자극을 받아 서서히 이완되기 시작했다.


타인의 가장 내밀한 고통과 약점을 짚어내어, 완벽한 ‘내 편’이자 구원자로 위장하는 것. 그것이 지안이 타겟의 마음을 무장 해제시키는 첫 번째 열쇠였다.


지안은 멍하니 커피를 받아 든 이 대리를 이끌고 창가의 인적이 드문 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사실, 이 대리님을 조만간 따로 한 번 뵙고 싶긴 했어요. 곧 재무팀에 아주 큰 지각변동이 있을 예정이거든요.”


음료를 마시려던 이 대리의 손이 굳었다. 지안은 목소리를 한 톤 낮춰,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거대한 비밀인 것처럼 은밀하게 속삭였다.


“이건 이 대리님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송 부장님, 조만간 그 자리에서 불명예스럽게 물러나실 겁니다. 윗선의 신뢰를 완전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잃으셨거든요.”


“네? 부장님이요? 그럴 리가요. 회사에 그분만큼 일에 미쳐 살고, 원리원칙 따지시는 분이 없는데… 무슨 횡령이라도 하셨단 말씀입니까?”


“원칙이 밥 먹여주나요. 조직은 유연함과 윗선을 향한 충성도로 굴러가는 겁니다. 문제는, 송 부장님이 짐을 싸게 될 때… 밑에서 죽어라 고생만 하던 실무진들이 통째로 ‘송태섭 라인’으로 묶여서 억울하게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거죠.”


지안은 이 대리의 눈을 정확히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특히 이 대리님처럼 이번 고과에서 무조건 과장 승진을 달아야 하는 분들은 더더욱 위험합니다. 당장 대출 이자 감당하시려면 올해 연봉 앞자리가 바뀌셔야 하잖아요? 만약 부장님과 엮여서 고과가 깎이거나 한직으로 밀려나면, 가정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셨습니까.”


지안의 말은 예리한 외과의사의 메스처럼 이 대리의 가장 연약한 급소를 후벼 팠다. 이 대리의 이마에 송글송글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송태섭이라는 든든한 방파제가 무너진다는 충격보다, 당장 다음 달의 생계와 대출금, 그리고 갓난아이의 분윳값이라는 지독히도 현실적인 공포가 그의 이성을 빠르게 마비시켰다. 뇌의 전두엽이 논리적인 사고를 멈추고, 편도체가 생존을 위한 사이렌을 미친 듯이 울려대기 시작한 것이다.


“저… 실장님.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불이익이라니요. 저는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매일 밤 코피 쏟아가며 열심히 야근한 죄밖에 없는데…….”


“알아요. 이 대리님이 얼마나 성실한지 제가 제일 잘 압니다. 그래서 제가 구명줄을 던져드리려는 겁니다.”


지안은 창밖의 빌딩 숲으로 시선을 돌리며, 마치 지나가는 혼잣말을 하듯 무심하게 언어의 씨앗을 툭 던졌다.


“송 부장님이 평소에 이 대리님을 비롯한 직원들에게 인격 모독적인 폭언을 일삼거나, 강압적인 분위기로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만 증명되면… 여러분은 징계 대상이 되는 부장님의 하수인이 아니라, 회사 차원에서 최우선으로 보호하고 구제해야 할 ‘피해자’로 분류됩니다. 오히려 그동안 악조건 속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낸 점을 높이 사서 이번 인사고과에 특별 가산점이 붙겠죠.”


“폭언이요…? 아니, 부장님이 숫자에 워낙 예민하셔서 보고서를 꼼꼼하게 보시긴 해도, 썅욕을 하시거나 물리적인 폭력을 쓰신 적은…….”


“이 대리님.”


지안이 부드럽지만 뱀처럼 서늘하고 단호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 이 대리와 눈을 맞췄다. 그녀의 형형한 동공이 흔들리는 이 대리의 시선을 꼼짝 못 하게 옭아맸다.


“폭력의 기준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정하는 겁니다. 아까 회의실에서 부장님이 결재 서류를 집어 던지듯 내려놓으며 수많은 동료들 앞에서 언성을 높였을 때, 이 대리님은 극심한 모멸감과 두려움을 느끼셨잖아요? 상사가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부하 직원의 자존감을 갉아먹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면, 그게 바로 명백한 폭언이고 직장 내 괴롭힘입니다.”


“그건…….”


“회사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어요. 다른 부서원들조차 사내 익명 게시판에 재무팀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거든요. 모두가 송 부장님의 폭력적인 방식을 지탄하고 있는데, 이 대리님 혼자서 그를 옹호하다가 ‘폭력에 동조한 공범’으로 낙인찍혀 함께 침몰하실 건가요?”


완벽한 거짓말. 사내 익명 게시판에는 재무팀이나 송 부장을 비난하는 글이 단 한 건도 올라온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안은 이 대리의 뇌리에 ‘보이지 않는 다수의 여론’이라는 환상을 강제로 주입했다. 나 혼자만 무리에서 이탈해 엉뚱한 선택을 하면 대중으로부터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인간 본연의 짐승 같은 군중 공포. 그것을 자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대리의 얕은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진실과 거짓, 옳고 그름의 경계가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결재 서류의 치명적인 오타를 지적하던 상사의 목소리는 ‘끔찍한 인격 모독’으로, 회사를 위해 독려하던 잦은 야근 지시는 ‘부당하고 악랄한 갑질’로 재조립되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 존경했던 상사를 흉악한 괴물로 둔갑시켜야 한다는 얄팍하고도 절박한 도덕적 타협이 그의 이성을 완벽하게 잠식해 갔다.


지안은 이 대리의 눈동자에서 일말의 죄책감이 흐려지고, 오직 내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이기적인 생존 본능이 번뜩이는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은은한 광택이 도는 명함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밀어주었다. 금박으로 새겨진 '특별감사팀장 서지안'이라는 글씨가 서늘하게 빛났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이 대리님. 가라앉는 배의 돛대에 몸을 묶은 채로 수장될지, 아니면 저와 함께 안전하고 안락한 새로운 구명보트에 올라탈지. 내일 오전 9시까지 감사팀 제 직통 번호로 연락 주시길 기다리겠습니다.”


지안은 나긋한 미소를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휴게실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왈츠를 추듯 가볍고 우아했다.


사냥감을 직접 향해 칼을 쥐고 달려드는 것은 무식한 삼류들이나 하는 짓이다. 진정한 포식자는 사냥감이 속한 무리 내부에 ‘공포’와 ‘생존 본능’이라는 이름의 독을 단 한 방울 떨어뜨리고, 그들이 스스로를 살기 위해 동료를 물어뜯게 만드는 법이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비친 서지안의 붉은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재무팀을 구성하는 열두 명의 실무진. 그들의 심연에 잠든 이기심과 팍팍한 삶의 불안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완벽하게 조작된 거대한 파멸의 서사를 엮어낼 준비가 모두 끝났다. 현대판 이단심문관의 무자비하고도 고요한 사냥이 막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