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사냥개의 후각

by 연구소장

짐승을 쫓는 사냥개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날카로운 이빨이나 억센 턱이 아니다. 그것은 사냥감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아주 미세한 불안의 냄새를 맡아내는 후각이다. 상처 입은 짐승은 반드시 핏자국을 남기고, 궁지에 몰린 인간은 반드시 욕망과 공포가 뒤섞인 삶의 궤적을 흘리기 마련이다.


태성그룹 본사 22층 특별감사팀의 아침은 언제나처럼 무균실처럼 고요하고 서늘했다.


서지안은 책상에 놓인 열두 개의 인사 파일 폴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재무팀 송태섭 부장 아래서 수족처럼 움직이는 실무진 열두 명. 평범한 인사 담당자의 눈에는 이들이 그저 대리, 과장, 차장이라는 직급과 고과 점수로 분류된 부속품들로 보이겠지만, 지안의 눈에 비친 이들의 파일은 하나하나가 훌륭한 ‘심리적 해부도’였다.


지안은 그들을 직급순으로 나열하지 않았다. 그녀가 서류를 재배치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 ‘누가 가장 먼저 무너져 내릴 것인가’ 하는 내면의 취약성이었다.


지안의 손가락이 가장 첫 번째로 집어 든 폴더의 이름은 ‘이동진 대리’였다.


어제 오후, 휴게실에서 달콤한 공포의 씨앗을 심어두었던 바로 그 사내. 지안의 시선이 시계를 향했다. 오전 8시 50분. 인간의 뇌가 밤새도록 불안에 시달리다 결국 현실적인 타협을 선택하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하룻밤이면 충분하다.


따르릉.


정확히 8시 55분, 지안의 책상 위 직통 전화가 짧은 파열음을 냈다. 지안은 서두르지 않고 향긋한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은 뒤, 나른하고 우아한 동작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네, 특별감사팀 서지안입니다.”


— 실장님. 저… 재무팀의 이동진 대리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지난밤, 좁은 침대 위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수백 번도 넘게 뒤척였을 사내의 지독한 피로와 절박함이 수화기 선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아, 이 대리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은 좀 주무셨습니까?”


— 어제 말씀하신… 그 구명보트라는 거. 지금도 유효한 겁니까.


지안의 붉은 입술이 매혹적인 호선을 그렸다.


“그럼요. 저는 한 번 내민 손은 거두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22층으로 올라오시죠. 아주 조용하고 안전한 방을 비워두겠습니다.”


특별감사팀 안쪽의 밀실. 창문 하나 없이 회백색 흡음재로 마감된 그곳은, 공간감마저 상실하게 만드는 기묘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이동진 대리는 차가운 철제 테이블 앞에 웅크리듯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지안이 미리 준비해 둔 [직장 내 괴롭힘 및 인격 모독 피해 진술서] 양식이 놓여 있었다. 여백으로 남겨진 하얀 종이를 바라보는 이 대리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실장님… 저는, 부장님을 고발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저….”


“알고 있습니다. 이 대리님은 가정을 지키려는 것뿐이죠. 조직의 부조리한 폭력에 맞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건 비겁한 배신이 아니라 정당한 방어입니다.”


지안은 이 대리의 맞은편에 앉아, 마치 고해성사를 듣는 자애로운 구원자처럼 한없이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기억이… 부장님이 서류를 집어 던지며 화를 내신 건 맞지만, 그걸 폭언이라고 적기에는 제 양심이….”


이 대리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괴로운 듯 신음했다. 도덕성과 생존 본능이 뇌의 전두엽에서 격렬하게 충돌하는 순간이었다. 지안은 그 얄팍한 양심의 저항이 얼마나 쉽게 바스러질 수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로 상체를 살짝 숙이며, 이 대리의 귓가에 조용히 언어의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이 대리님. 양심이라는 건, 내가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람들의 안위가 완벽하게 보장되었을 때나 부릴 수 있는 사치입니다. 갓 태어난 딸의 웃는 얼굴을 떠올려보세요.”


‘딸’이라는 단어에 이 대리의 어깨가 강하게 움찔거렸다.


“송 부장님은 며칠 내로 그룹에서 불명예스럽게 쫓겨날 겁니다. 이건 확정된 미래예요. 이 대리님이 여기서 입을 다물고 송 부장님을 감싼다고 해서 그분이 구제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이 대리님 혼자서 ‘폭력적인 상사에게 기생했던 무능한 직원’이라는 낙인을 공유하며 함께 무너져 내릴 뿐이죠. 다음 달 은행 대출 원리금 상환일이 언제라고 하셨죠?”


지안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지만, 그 내용은 예리한 메스처럼 이 대리의 뇌수 깊은 곳에 자리한 가장 원초적인 공포를 후벼 팠다.


“부장님의 그 사소해 보이는 통제 불능의 짜증 때문에, 이 대리님은 매일 밤 위경련을 앓으며 소화제를 달고 사셨잖아요. 상사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하며 가장으로서의 자존감이 깎여나갔던 그 수많은 밤들을 왜 축소하려 하십니까? 피해자는 이 대리님입니다. 당당하게 권리를 찾으세요.”


인간의 기억은 객관적으로 녹화된 영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감정과 이익, 그리고 주변의 암시에 따라 언제든 입맛에 맞게 편집되고 조립되는 무른 진흙과 같다.


지안이 심어준 합리화의 논리 속에서, 이 대리의 머릿속 기억들은 빠르게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부서의 실적을 위해 꼼꼼하게 오타를 지적하던 송 부장의 엄격함은 ‘숨 막히는 학대’로 변질되었고, 야근을 독려하며 사주던 저녁 식사는 ‘사생활 침해와 억압’으로 완벽하게 왜곡되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저 남자를 악마로 만들어야 한다는 숭고한 명분. 그것은 이 대리에게 달콤한 면죄부가 되어주었다.


결국, 이 대리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만년필을 쥐었다.


백지의 진술서 위로, 있지도 않은 모욕적인 폭언들과 과장된 피해 의식이 잉크가 되어 새겨지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종이 위를 긁어대는 펜촉의 마찰음은 지안에게 세상 어떤 교향곡보다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잘하셨습니다, 이 대리님.”


지안은 빼곡하게 채워진 진술서를 받아 들고는, 마치 상처받은 아이를 달래듯 이 대리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이제 이 대리님은 이 지옥 같은 진흙탕에서 벗어나신 겁니다. 이번 인사고과에서는 제가 직접, 이 대리님이 그동안 겪은 끔찍한 고통을 보상받을 수 있도록 최상위 등급을 보장하겠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이 대리가 연신 고개를 숙이며 밀실을 빠져나갔다. 자신이 누군가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오직 살아남았다는 이기적인 안도감에 취해 비틀거리는 뒷모습.


지안은 그 굽은 등을 관찰하며 차가운 조소가 어린 미소를 지었다.


견고한 성벽에 첫 번째 균열이 생겼다. 하나가 무너지면, 나머지를 무너뜨리는 것은 중력의 법칙만큼이나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다.


지안은 곧바로 수화기를 들어 특감팀의 데이터 분석실로 전화를 걸었다.


“박 대리. 내 방으로.”


몇 분 뒤, 지안의 집무실 문이 열리고 깡마른 체구의 사내가 소리 없이 들어왔다.


태성그룹 본사 22층은 임원진과 전략기획실이 포진해 있어, 숨 막힐 정도로 엄격한 정장 차림의 복장 규정이 불문율처럼 적용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박 대리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언제나처럼 헐렁한 짙은 회색 후드티를 푹 뒤집어쓰고, 그 위에 캡 모자를 눌러쓴 채 뿔테 안경 너머로 흐릿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인사팀의 깐깐한 간부들조차 그의 기이하고 불량스러운 패션에 침묵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타인의 개인 디바이스와 사내 클라우드를 오가며, 삭제된 메신저 로그와 은밀한 검색 기록들을 보안 시스템의 경고음 한 번 울리지 않고 완벽하게 복원해 내는 그의 압도적인 정보 수집 능력 때문이었다. 박 대리는 서지안이 가장 아끼는 훌륭한 사냥개 중 하나였다.


“부르셨습니까, 실장님.”


“재무팀 김태경 과장의 개인 파일. 추가로 파악된 게 있나?”


지안이 짧게 묻자, 박 대리는 후드티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을 빼내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뿔테 안경이 모니터 불빛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네. 최근 김 과장의 사내망 웹서핑 기록과 개인 메일의 캐시 데이터를 추적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패턴이 있더군요.”


박 대리가 화면을 넘기자, 수십 장의 부동산 매물 사진과 주택담보대출 금리 계산기 화면이 캡처되어 나타났다.


“서울 도심 한복판의 신축 아파트 매물들입니다. 호가가 대략 15억에서 18억 원 선이더군요. 김 과장은 최근 세 달 동안 매일같이 이 지역의 시세와 한도 끝까지 끌어모을 수 있는 영끌 대출을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주말에는 아내와 함께 해당 지역의 부동산 중개소를 네 곳이나 방문한 GPS 기록도 확인했습니다.”


지안의 눈매가 날카롭게 좁아졌다.


15억. 태성그룹 과장급 연봉으로도 섣불리 덤비기 힘든, 평범한 직장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목숨을 담보로 걸어야 하는 거대한 성채였다.


“김 과장의 현재 재무 상태라면, 이 정도 매물은 명백한 무리가 아닌가?”


“맞습니다. 턱없이 부족하죠. 양가 부모님의 지원을 끌어오더라도 대출 비중이 위험 수위입니다. 하지만 올해 초 아이가 명문 학군에 진학할 나이가 되면서, 이른바 '서울 입성'에 대한 아내의 압박이 극에 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건, 이 살인적인 대출을 승인받으려면 현재 김 과장의 연봉과 직급이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된다는 전제가 필수적이라는 겁니다.”


“완벽하네.”


지안은 태블릿 PC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툭 치며 낮게 탄성을 내뱉었다.


김태경 과장. 재무팀 내에서 송태섭 부장의 오른팔이자, 실무진들을 실질적으로 통솔하는 가장 핵심적인 인물. 그가 무너지지 않으면 나머지 열 명의 평사원들을 온전히 장악할 수 없다.


가장의 묵직한 무게, 그리고 아내가 갈망하는 서울 도심 신축 아파트라는 평생의 꿈. 그 꿈의 문턱에서 발을 헛디디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는 극한의 불안. 지안은 김 과장의 목을 조르고 있는 가장 무거운 족쇄가 무엇인지 완벽하게 파악했다.


“박 대리. 수고했어. 계속해서 재무팀 내 메신저 트래픽 모니터링 유지해.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낌새가 보이면 바로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박 대리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후드티 자락을 펄럭이며 소리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지안은 책상 서랍에서 두 번째 인사 파일을 꺼내 들었다. 사냥개의 코끝에 가장 짙고 끈적한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막 끝날 무렵, 본사 지하 1층의 한적한 흡연구역.


재무팀 김태경 과장은 연거푸 줄담배를 피우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방금 전 부동산 중개인과 통화를 마친 참이었다. 며칠 전 가계약을 걸어둔 서울 아파트. 매도인이 갑자기 호가를 5천만 원이나 올리려 한다는 소식에, 그의 머릿속은 부족한 자금을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메울 것인가 하는 계산으로 터질 듯이 복잡했다.


“김 과장님. 담배를 너무 깊게 피우시네요.”


등 뒤에서 들려온 서늘하고 매혹적인 목소리에 김 과장이 흠칫 놀라며 돌아보았다. 서지안 실장이었다. 매캐한 연기가 자욱한 흡연 구역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잡지에서 튀어나온 듯한 완벽한 슈트 차림의 그녀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 서 실장님. 안녕하십니까.”


김 과장은 황급히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며 허리를 굽혔다. 직급은 같았지만, 그룹 내 막강한 실세인 특별감사팀장이 뿜어내는 공기는 차원이 달랐다.


“요새 고민이 많으신가 봅니다. 얼굴이 많이 상하셨어요.”


“아, 아닙니다. 결산 시즌이라 야근이 좀 잦아서 그렇습니다.”


지안은 김 과장의 방어적인 태도를 허물기 위해, 에두르지 않고 곧바로 그의 심장부를 향해 비수를 꽂아 넣었다.


“서울 한복판의 그 신축 아파트를 보고 계시다면서요? 요즘 그쪽 호가가 자고 일어나면 뛴다던데, 대출 한도 알아보시느라 골치 아프시겠어요. 15억이면, 김 과장님 연봉에 꽤 무리가 갈 텐데 말입니다.”


김 과장의 눈이 부릅떠졌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개인사를, 그것도 정확한 지역과 금액까지 감사팀장이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오싹함이 밀려왔다.


“실장님께서… 그걸 어떻게…….”


“저희 감사팀이 하는 일이 원래 임직원들의 고민을 남들보다 미리 파악하고 해소해 드리는 거 아닙니까.”


지안은 한 걸음 다가가, 김 과장의 흔들리는 눈을 정면으로 꿰뚫어 보았다.


“가장으로서 가족들에게 번듯한 서울 집 하나 마련해주겠다는 그 훌륭한 책임감, 제가 참 존경합니다. 그런데 김 과장님. 그 위태로운 모래성 위에, 지금 끔찍한 폭탄 하나가 떨어지기 직전이라는 거 알고 계십니까?”


“폭탄… 이라니요.”


“송태섭 부장님 말입니다.”


김 과장의 숨이 멎었다.


“송 부장님은 이미 부사장님의 눈 밖에 났습니다. 그분이 무리하게 올렸던 해외 프로젝트 반대 보고서, 그게 그룹 윗선의 심기를 얼마나 거스른 줄 아십니까? 부장님은 며칠 내로 해임 수순을 밟게 될 겁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부장님은 회사를 위해, 그룹의 손실을 막기 위해 정당한 의견을 내신 겁니다. 장부상 숫자에 명백한 문제가 있으니까….”


“김 과장님, 순진한 소리 마세요.”


지안의 목소리가 단박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조직은 옳은 숫자가 아니라 힘의 논리로 굴러갑니다. 중요한 건, 송 부장님이 날아갈 때 그 밑에서 오른팔 노릇을 했던 김 과장님이 가장 먼저 ‘숙청 대상 1순위’로 지목될 거라는 사실이죠. 무기한 대기발령, 혹은 실적이 나오지 않는 지방 자회사로의 좌천. 그렇게 되면 다음 달로 예정된 수십억 대의 주택담보대출 심사가 과연 어떻게 될까요?”


김 과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은행 대출. 깐깐한 재직 증명서와 원천징수 영수증, 그리고 향후 안정적인 소득을 완벽하게 증명해야만 떨어지는 생명줄. 만약 대기발령이 나거나 연봉이 깎이는 한직으로 밀려난다면, 대출은 당장 거절될 것이고, 이미 치러둔 계약금 1억 원을 허공에 날리는 것은 물론 내 집 마련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게 된다. 평생을 바쳐 쌓아온 가정의 행복과 아내의 기대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지안은 김 과장의 뇌리에서 전두엽의 이성적인 판단 기능이 정지하고, 편도체가 뿜어내는 극단의 생존 공포가 지배하는 찰나의 과정을 여유롭게 감상했다.


“가족들을 빚더미에 앉게 할 텐가요? 송태섭이라는 이미 썩어 문드러진 동아줄 하나에 대한 그 알량한 의리 때문에?”


“실장님… 제발. 저는,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 과장의 목소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뼛속까지 태성맨이었고, 평생 송 부장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사내의 꼿꼿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가장의 짓눌린 본능만이 남아, 눈앞의 서지안을 향해 구원을 갈구하고 있었다.


지안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서류 한 장을 꺼내 김 과장의 가슴 포켓에 찔러 넣었다.


“이동진 대리를 비롯한 재무팀 막내들은 이미 살길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송 부장님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지시에 시달려왔다는 진술서에 서명하고, 스스로를 억압받은 ‘피해자’로 구제받았죠. 이제 실무 총괄인 김 과장님의 선택만 남았습니다.”


김 과장은 가슴에 꽂힌 서류의 서늘한 감촉에 흠칫 놀랐다.


“실무를 총괄하는 김 과장님이, 송 부장님의 폭언과 부당한 업무 지시를 견디다 못해 부서원들을 대표하여 내부 고발을 한 것으로 서사를 짜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과장님은 적폐 라인의 잔당이 아니라, 부조리에 맞선 용기 있는 ‘내부 고발자’이자 영웅이 되는 겁니다. 은행 대출 심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제가 직접 인사팀을 눌러서 과장님의 이번 고과를 최상위로 픽스해 드리죠. 서울 아파트, 무사히 입주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악마의 속삭임은 언제나 가장 현실적이고 달콤한 논리의 탈을 쓰고 다가온다.


송태섭은 훌륭한 상사였다. 까칠하긴 했어도 누구보다 부하들을 아꼈고, 불의를 참지 못했다. 그러나 그 알량한 존경심이 내 아이가 살아갈 서울의 안전한 울타리를 마련해 주지는 않는다. 조직의 거대한 폭력이 자신의 가정을 겨누고 있다는 공포 앞에서, 김 과장이 평생 쌓아온 도덕적 기준은 형편없이 무너져 내렸다.


“제가… 제가 무엇을 쓰면 됩니까.”


김 과장이 핏발 선 눈으로 지안을 쳐다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지안의 입가에 완벽한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부장님이 과장님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하며 결재판을 집어 던졌던 일. 실무진들에게 강압적으로 야근을 지시하며 노예처럼 부렸다는 사실. 그걸 과장님의 언어로 아주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적어주시면 됩니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다수가 그것을 진실이라고 합의하기만 하면, 그게 곧 사실이 되니까요.”


“알겠습니다… 쓰겠습니다.”


“오늘 오후 5시까지, 22층 제 집무실로 가져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지안은 김 과장의 굳은 어깨에 묻은 보이지 않는 먼지를 가볍게 털어내 주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흡연 구역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경쾌하게 복도를 울렸다.


무리를 이끄는 가장 강력한 부두목이 무너졌다. 이제 남은 자잘한 초식동물들을 도륙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오후 4시. 재무팀 사무실.


사무실의 공기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위태로웠다. 송 부장은 임원 회의에 참석하느라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파티션 너머로 김태경 과장과 이동진 대리가 연거푸 깊은 한숨을 내쉬며 초조하게 모니터만 바라보는 모습이 다른 팀원들의 시야에 잡혔다. 인간은 집단 내의 공기 변화에 극도로 예민한 동물이다. 짐승들이 폭풍우가 오기 전 미세한 기압 변화를 감지하고 황급히 둥지를 떠나듯, 팀원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이 탄 배가 무언가 거대한 암초에 부딪혀 가라앉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 불안한 침묵을 찢어발긴 것은 사내 메신저로 일제히 날아든 한 통의 팝업 메시지였다. 발신자는 특별감사팀 서지안 실장. 수신자는 김 과장과 이 대리를 제외한 나머지 열 명의 실무진 전원이었다.


[특별감사팀에서 안내드립니다. 현재 재무팀 송태섭 부장의 직장 내 괴롭힘 및 인격 모독 혐의에 대해, 다수의 내부 고발을 접수하여 내사 중에 있습니다. 본 사건과 관련하여 불이익을 당하거나 억압받은 사실이 있는 팀원분들은 오늘 오후 6시까지 22층 감사팀으로 방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본 조사는 철저한 익명과 신변 보호를 원칙으로 하며, 조사에 협조하지 않아 발생하는 추후의 인사상 불이익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메시지를 읽은 팀원들의 모니터 위로 짙은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다수의 내부 고발'.


그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서로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누구지? 누가 벌써 부장님을 팔아넘긴 거지?


그때, 침묵을 지키던 김태경 과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서류 봉투 하나를 챙겨 들고는 사무실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이어서 이동진 대리 역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김 과장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손에 꽉 쥐어진 서류 봉투의 의미가 무엇인지, 남은 열 명의 팀원들은 바보가 아닌 이상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과, 과장님도 부장님을….”


“이 대리마저.”


사무실 곳곳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쩍쩍 들려왔다.


재무팀의 실세인 김 과장과, 평소 가장 성실하게 송 부장을 따랐던 이 대리마저 송 부장의 등에 칼을 꽂으러 22층으로 올라갔다. 이 거대한 배신의 물결은 이제 개인의 양심 따위로는 돌이킬 수 없는 완벽한 대세(大勢)가 되어버렸다.


'조사에 협조하지 않아 발생하는 추후의 인사상 불이익.'


메신저의 마지막 문장이 시뻘건 인두처럼 그들의 뇌리를 때렸다. 만약 나 혼자만 끝까지 부장님을 옹호하며 이 자리에 남아있는다면? 나만 이 거대한 쿠데타에서 소외되어, 윗선의 끔찍한 보복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게 된다면?


“나… 나도 가야겠어. 지난번에 부장님이 내 보고서 찢어버린 거, 그거 억울해서라도 말해야지.”


“맞아. 솔직히 우리 그동안 숨 막혀서 어떻게 일했냐. 송 부장 그 양반, 사이코패스 기질이 있었다니까. 나도 당장 올라갈 거야.”


가장 나약하고 이기적인 군중의 광기가 전염병처럼 사무실을 집어삼켰다. 그들은 자신들의 비열한 배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송 부장의 아주 작은 흠집들을 현미경으로 확대하여 끔찍한 범죄로 둔갑시키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의 환상에 동조하며, 그들은 마치 살기 위해 옆집 이웃을 마녀로 고발하러 종교재판소로 달려가는 중세의 광인들처럼 앞다투어 22층을 향해 달음질쳤다.


오후 6시 30분.


22층 특별감사팀 서지안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똑같은 규격의 하얀색 진술서 열두 장이 정갈하게 쌓여 있었다.


[직장 내 괴롭힘 및 인격 모독 피해 진술서]


열두 명의 서명과 붉은 지장이 선명하게 찍힌, 완벽하게 조작된 거짓의 산물. 이 종이 무더기들은 단순한 문서가 아니었다. 한 인간의 사회적 생명을 영원히 끊어놓고, 그를 세상에서 가장 역겨운 짐승으로 박제시켜 버릴 완벽하고도 예리한 단두대의 칼날이었다.


지안은 최고급 가죽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앉아 그 하얀 종이탑을 황홀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물리적인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오직 인간의 뇌가 가진 이기심과 공포만을 자극하여 타겟의 팔다리를 잘라낸 가장 우아하고 예술적인 사냥.


지안은 통유리 창밖으로 붉게 저물어가는 서울 도심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서랍에서 붉은색 결재 도장을 꺼냈다.


"자, 이제."


지안의 붉은 입술 사이로 서늘하고 매혹적인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도마 위에 올려진, 저 오만하고 고상한 마녀의 숨통을 우아하게 끊어볼까."


내일 아침이면, 티끌 하나 없이 결백했던 원리원칙주의자 송태섭 부장은 수많은 부하 직원들을 학대하고 폭언을 일삼은 파렴치한 범죄자로 전락하여, 특별감사팀 취조실의 차가운 의자에 앉게 될 것이다.


사냥개의 코끝을 자극했던 미세한 불안의 냄새는, 이제 거대한 피비린내가 되어 태성그룹의 22층을 묵직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이단심문관 서지안의 완벽한 덫이 마침내 그 서늘한 이빨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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