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마녀가 된 충신

by 연구소장

태성그룹 본사 22층, 여성 임원 전용 파우더룸.


대리석 세면대 앞의 거대한 거울에 비친 서지안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감탄을 자아낼 만큼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한 치의 구김도 없이 허리선이 매끈하게 떨어지는 차콜 그레이 색상의 펜슬 스커트 슈트, 살갗이 은은하게 비치는 검은색 스타킹, 그리고 날카롭게 벼려진 9센티미터짜리 스틸레토 힐.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 아래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는 매혹적이면서도 범접하기 힘든 서늘함을 풍겼다.


지안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립스틱을 꺼내어,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 위에 선명한 붉은색을 덧칠했다.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친 그녀의 붉은 입술이 우아한 호선을 그렸다.


대한민국 재계 서열 5위의 태성그룹. 이곳은 뼛속까지 남성 중심적인 군대식 문화가 지배하는 거대한 콜로세움이었다. 50대 이상의 굵직한 사내들이 담배 연기 자욱한 밀실에서 주먹을 책상에 내리치며 서열을 정리하는 이 짐승들의 세계에서, 30대 후반의 젊은 여성인 서지안이 전략기획실 산하 특별감사팀장이라는 권력의 핵심에 앉아 있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기적이며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사내의 늙은 수컷들은 종종 지안의 아름다운 외모와 나긋나긋한 여성성을 약점으로 착각하곤 했다. 그들은 지안이 윗선의 총애를 받는 '얼굴마담'이거나, 운 좋게 발탁된 얌전한 서포터일 것이라 속단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지안에게 여성성이란, 수컷들의 경계심을 완벽하게 허물어뜨리고 그들의 가장 부드러운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진화한 최고급 위장복이자 가장 예리한 무기라는 사실을. 근력으로 상대를 제압할 필요가 없었다. 포식자의 진정한 힘은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 타인의 뇌를 조종하여 스스로 벼랑 끝에서 뛰어내리게 만드는 심리적 장악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 잔혹하고도 우아한 사냥법을, 지안은 아주 오래전 열일곱 살의 봄에 이미 깨우쳤다.


[기원: 첫 번째 마녀사냥]


이십 년 전, 지안이 다니던 지방의 보수적인 여고.


당시 지안은 눈에 띄게 아름다웠지만 늘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책만 읽는,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난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그 학교에는 이사장의 조카이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학생주임 교사가 있었다. 그는 여학생들의 치마 길이를 단속한다는 명목으로 다리를 불쾌하게 쓰다듬었고, 부모의 직업에 따라 학생들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쓰레기였다.


모두가 그를 증오했지만, 아무도 입 밖으로 불만을 내뱉지 못했다. 학생부 기록이라는 거대한 권력 앞에 어린 여학생들은 숨을 죽였다.


어느 날, 그 학생주임이 지안을 교무실로 따로 불렀다. 그리고 지안의 어깨를 징그럽게 주무르며 모욕적인 농담을 던졌다. 평범한 열일곱 살의 소녀라면 수치심에 눈물을 흘리거나 도망쳤을 것이다. 그러나 지안의 동공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에 닿은 끈적한 손길을 느끼며, 분노 대신 아주 차갑고 투명한 이성으로 상황을 분석했다.


‘내가 당장 소리를 지르고 반항해 봐야, 어른들은 권력을 가진 저 남자의 편을 들 것이다. 물리적인 힘으로도, 사회적인 지위로도 나는 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저 거대한 코끼리를 쓰러뜨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안은 그날 밤, 기숙사에서 가장 입이 가볍고 피해 의식이 강한 무리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주 은밀하고도 조심스럽게, 눈물을 글썽이는 연기를 하며 '학생주임이 나뿐만 아니라 너희들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라'는 암시를 흘렸다.


지안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십 대 소녀들이 공유하는 특유의 연대감과, 그 기저에 깔린 히스테리적인 불안감을. 그녀가 던진 작은 불씨는, 그동안 학생주임의 억압에 시달려왔던 여학생들의 무의식을 맹렬하게 타격했다.


“맞아, 나도 그때 그 기분 나쁜 시선을 느꼈어!”


“그거 명백한 성추행 아니야? 우리끼리만 당할 수 없잖아!”


분노는 전염병보다 빠르게 번졌다. 지안은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저 뒤에서 여론의 흐름을 조율하고, 아이들이 스스로 익명 게시판에 글을 올리도록 유도하며, 학부모들의 치맛바람을 자극할 수 있는 자극적인 단어들(성추행, 권력 남용, 성적 조작)을 교묘하게 세팅해주었을 뿐이다.


결과는 끔찍할 정도로 완벽했다. 학부모들이 학교로 몰려와 시위를 벌였고, 교육청의 감사가 떨어졌다. 진실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수백 명의 여학생과 학부모가 한목소리로 그를 ‘변태 성욕자이자 악마’로 지목하자, 이사장조차 그를 감싸지 못하고 버렸다.


학교에서 쫓겨나던 날, 학생주임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지안은 교실 창밖으로 그 비참한 몰락을 내려다보며 태어나 처음으로 짜릿한 환희를 느꼈다.


물리적인 힘이 약한 여성이라도, 아니, 오히려 연약해 보이는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을수록 대중의 동정과 광기를 이끌어내기 쉽다. 진실은 다수가 합의하는 순간 창조되는 것이며, 군중의 공포를 통제하는 자가 곧 신이 된다는 사실.


그날 이후 지안은 단 한 번도 남성들의 완력이나 조직의 수직적인 권력에 주눅 든 적이 없었다. 그 거대한 괴물들의 뇌 구조를 해체하고 조립하는 조이스틱이, 언제나 지안의 섬세한 손끝에 쥐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실장님.”


파우더룸의 문이 열리며 특감팀 소속의 여직원이 들어왔다. 거울 앞의 지안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나긋나긋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재무팀 실무진 나머지 열 명. 지금 전원 22층 대기실에 도착해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어제 오후, 재무팀의 실세인 김 과장과 이 대리가 특감팀으로 불려 올라가 송태섭 부장을 고발하는 진술서에 서명했다는 소문이 부서 전체를 강타했다. 지안이 던져놓은 ‘조사에 협조하지 않을 시의 인사상 불이익’이라는 거대한 공포는, 밤새 재무팀 직원들의 전두엽을 갉아먹으며 그들을 완벽한 이기주의의 노예로 전락시켰다.


결국 날이 밝자마자, 남은 열 명의 직원들은 행여나 자신만 배신자의 대열에서 누락되어 불이익을 당할세라 앞다투어 22층으로 달려온 것이다.


“한 명씩, 제 집무실로 들여보내세요. 따뜻한 차도 한 잔씩 내어드리고.”


지안은 립스틱을 닫아 핸드백에 넣고 파우더룸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가는 그녀의 하이힐 소리(또각, 또각)가 오늘따라 유난히 경쾌하게 22층의 서늘한 공기를 갈랐다.


집무실로 들어온 첫 번째 사냥감은 재무팀의 유일한 여성 실무진인 최 대리였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지안의 책상 맞은편에 쭈뼛거리며 앉았다. 지안은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마치 친언니처럼 다정하게 그녀의 차가운 손을 감싸 쥐었다.


“최 대리님. 여기까지 올라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실장님… 저, 저는 사실 부장님께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는데요… 다들 올라간다고 하니까 무서워서….”


지안은 그녀의 말을 부드럽게 자르며, 여성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깊은 연대감의 뉘앙스를 깔고 속삭였다.


“최 대리님. 이 남성 중심적인 삭막한 태성그룹에서, 우리 같은 여자들이 버티는 게 얼마나 숨 막히는 일인지 제가 제일 잘 압니다. 송 부장님, 평소에 최 대리님 옷차림 지적 자주 하셨죠? 치마가 짧다느니, 단정하지 못하다느니.”


“네? 아… 그건 외부 클라이언트 미팅 때 한 번….”


“그게 성희롱입니다.”


지안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권력을 가진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 직원의 외모와 복장을 통제하려 드는 것. 그 불쾌한 시선 속에서 최 대리님이 느꼈던 무력감과 모멸감을 왜 사소한 일로 치부하려 하세요? 최 대리님은 지금 부장님을 배신하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짓눌려왔던 여성으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는 겁니다. 제가 지켜드릴 테니, 용기를 내세요.”


완벽한 프레이밍이었다. 지안의 세련된 외모와 부드러운 목소리가 뿜어내는 '같은 여성으로서의 든든한 연대감'은 최 대리의 알량한 죄책감을 완벽하게 씻어주었다. 최 대리는 결국 눈물을 훔치며 진술서에 송 부장의 훈계를 끔찍한 성적 수치심 유발 사건으로 둔갑시켜 적어 내려갔다.


다음은 승진에 누락된 만년 차장, 그다음은 계약직 여사원.


지안은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나이, 성별, 그리고 그들이 안고 있는 현실적인 결핍(돈, 명예, 생존)에 맞추어 자신의 페르소나를 완벽하게 바꾸어 나갔다. 때로는 자애로운 구원자로, 때로는 정의로운 선도자로, 때로는 잔혹한 현실을 일깨워주는 냉혹한 심판관으로.


오전 11시 30분.


마침내 재무팀 열두 명 전원의 지장이 찍힌 열두 장의 [직장 내 괴롭힘 및 인격 모독 피해 진술서]가 지안의 책상 위에 가지런히 쌓였다. 한 인간의 사회적 생명을 완벽하게 끊어놓고, 그를 역겨운 마녀로 화형대에 세울 완벽한 장작더미가 완성된 것이다.


지안은 수화기를 들었다.


“재무팀 송태섭 부장님. 22층 특별감사팀 취조실로 모셔 오세요.”


본사 22층 가장 안쪽의 밀실.


이곳은 창문 하나 없이 회백색 흡음재로 마감되어 있어 소리의 파동조차 먹먹하게 사라지는 곳이었다. 천장에 달린 건조한 할로겐 조명 아래, 차가운 철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송태섭 부장과 서지안이 마주 앉아 있었다.


송 부장은 막 임원 회의를 마치고 올라온 참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무례하게 자신을 소환한 감사팀에 대한 깊은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서지안 실장. 이게 지금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송 부장이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치며 목소리를 깔았다. 50대 중반의 뼈 굵은 임원 특유의 강압적인 기운이 밀실을 채웠다. 그는 30대 후반의 젊고 갸름한 여성인 서지안을 은연중에 얕잡아보고 있었다. 기껏해야 부사장의 지시를 받고 숫자를 캐러 다니는 사냥개 정도로 여긴 것이다.


“본사 임원인 나를, 소명 기회도 없이 이런 취조실에 가둬두다니. 나를 그깟 해외부동산 건의 배임으로 엮을 작정이면 포기하시오. 나는 내 10년 치 법인카드와 내 아내의 통장까지 단 1원의 오점도 없이 깨끗하게 살아온 사람이오.”


지안은 다리를 우아하게 꼬고 앉아, 깍지 낀 손 위에 턱을 괸 채 송 부장의 분노를 여유롭게 감상했다. 수컷들이 자신의 지위와 목소리 크기로 위기를 모면하려 드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안쓰럽고 단조로웠다.


“송 부장님.”


지안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리며, 벨벳처럼 부드럽지만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돈 문제로 부장님을 모신 게 아닙니다. 횡령이나 배임 같은 촌스러운 죄목은 부장님처럼 훌륭한 원리원칙주의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죠.”


지안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의 스틸레토 힐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탁, 탁, 하고 일정한 박자로 취조실을 울렸다. 지안은 테이블을 돌아 송 부장의 등 뒤로 걸음을 옮겼다.


“어떤 사람을 무리에서 영원히 지워버리고 싶을 때, 굳이 그 사람의 계좌를 뒤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우리 모두의 일상을 위협하는 폭력적인 '괴물'이라는, 아주 사소하고도 끔찍한 서사 하나면 충분하니까요.”


지안은 들고 있던 묵직한 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 송 부장의 눈앞으로 툭 던져놓았다.


“열어보시죠.”


송 부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봉투를 열었다. 하얀 A4 용지 수십 장이 쏟아져 나왔다. 상단에 붉은색으로 인쇄된 제목을 본 순간, 송 부장의 숨이 헉, 하고 멎었다.


[직장 내 괴롭힘, 성희롱 및 인격 모독 피해 진술서]


“이… 이게 다 무슨 미친 소리요?”


“부장님이 ‘내 새끼들’이라 부르며 그토록 아꼈던 재무팀. 그곳에서 일하는 열두 명의 실무진 전원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자필로 작성하고 지장을 찍은 진술서들입니다.”


송 부장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황급히 넘기며 내용을 눈으로 좇았다.



결재 서류를 집어 던지며 모욕적인 썅욕을 일삼았음. (이동진 대리)


여성 직원의 치마 길이와 외모를 노골적으로 평가하여 극심한 성적 수치심을 유발함. (최은영 대리)


본인의 실적을 위해 억지로 야근을 강요하고 노예처럼 부림. (김태경 과장)



“말도 안 돼…! 이건 완벽한 날조요!”


송 부장이 이성을 잃고 핏대를 세우며 서류 뭉치를 테이블 위로 패대기쳤다. 하얀 종이들이 눈꽃처럼 바닥으로 흩어졌다.


“내가 언제 성희롱을 했단 말이오! 거래처 미팅을 앞두고 치마 대신 바지를 입으라고 훈계한 게 성희롱이오? 야근? 내가 시키기 전에 본인들이 남아서 일한 거요! 내 오른팔인 김태경이, 그놈이 나한테 이럴 리가 없어. 내가 지 집안 대소사까지 다 챙겨줬는데!”


오랜 세월 엘리트로 살아온 사내의 무너져 내리는 절규.


지안은 바닥에 흩어진 종이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중세의 이단심문관들이 화형대 위의 마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토록 차갑고 건조했을까.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장님.”


지안이 송 부장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횡령은 돈을 물어내고 징계를 받으면 그만이지만, ‘부하 여직원을 성희롱하고 팀원들을 학대한 악질 꼰대 상사’라는 프레임은 다릅니다. 이 서류가 외부로 유출되는 순간, 부장님은 사회적으로 완벽하게 매장당합니다. 부장님의 그 고상한 사모님과 훌륭하게 자란 자제분들이 뉴스에서 이 기사를 보게 된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네년이… 네년이 내 부하들을 협박해서 억지로 쓰게 만든 거잖아!”


송 부장이 두 손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눈가에는 이미 절망과 분노가 뒤섞인 시뻘건 핏발이 서 있었다. 덩치 큰 사내가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위협적인 포즈를 취했지만, 지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한 걸음 다가가, 붉은 입술을 끌어 올리며 아름답고도 잔인하게 웃었다.


“당장 대질심문해! 그 녀석들 다 이 방으로 불러오란 말이야! 내 눈앞에서, 내 얼굴을 보고 직접 말해보라고 해!”


송 부장의 발악에 지안은 대답 대신, 테이블 밑에 부착된 리모컨 버튼을 꾹 눌렀다.


낮게 윙- 하는 기계음과 함께, 밀실의 우측 벽면 전체를 덮고 있던 거대한 불투명 유리가 서서히 투명도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이 취조실은 밖에서는 안이 보이고, 안에선 밖이 보이지 않게 조작할 수 있는 특수 매직미러 구조였다.


“부장님이 원하시니, 직접 확인하시지요.”


투명해진 거대한 통유리창 너머.


그곳 복도에는 조금 전까지 송 부장이 결백을 주장하며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재무팀 직원 열두 명이 일렬로 굳게 서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


송 부장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짐승의 신음이 새어 나왔다.


유리창 너머의 직원들은 송 부장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어깨를 떨며 시선을 피하거나, 굳은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 누구의 얼굴에도 억지로 끌려온 자의 억울함이나, 상사를 잃은 슬픔은 없었다. 그들의 눈빛에 담긴 것은 오직 하나. '당신이 이대로 조용히 죽어주어야 우리의 평온한 일상과 대출금이 유지된다'는 섬뜩하고도 차가운 생존 본능뿐이었다. 그들은 이미 송태섭이라는 마녀를 불태우기 위해 스스로 횃불을 치켜든 공범자들이었다.


“김 과장… 이 대리… 최 대리… 너희들이… 어떻게 나한테…….”


자신이 온 마음을 다해 지키려 했던 무리로부터의 완벽한 배척.


송 부장의 육중한 무릎이 힘없이 꺾이며, 그가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인간의 뇌는 견딜 수 없는 극단적인 사회적 고립을 경험할 때, 살갗이 찢어지는 것과 동일한 수준의 물리적 고통을 느낀다. 전두엽의 합리적인 이성이 완전히 마비되고, 오직 포식자 앞에서 덜덜 떠는 초식동물의 원초적 공포만이 남은 상태.


송 부장은 이제 자신의 결백을 항변할 언어조차 잃어버린 채, 두꺼운 유리창을 향해 의미 없는 손길만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꼿꼿하고 자존심 강했던 50대 남성 엘리트가, 30대 여성 감사팀장의 치밀한 심리전 앞에 영혼이 거세된 고깃덩어리로 무너져 내리는 과정. 지안은 그 황홀하고도 참혹한 파멸의 풍경을 아주 느릿하고 길게 음미했다.


그녀는 바닥에 엎드려 가쁜 숨을 헐떡이는 송 부장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굽 높은 스틸레토 힐을 신은 채 우아하게 쪼그려 앉아, 그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송 부장님. 부장님은 장부상의 숫자를 다루는 데는 완벽했을지 몰라도, 인간이라는 동물이 본질적으로 얼마나 비겁하고 나약한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너무나 오만하고 무지했습니다.”


지안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빳빳한 고급 용지 한 장과 몽블랑 만년필을 꺼내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여백의 중앙에 [사직서]라는 세 글자가 정갈하게 인쇄된 종이였다.


“오늘 자로, 일신상의 사유를 들어 사직서를 제출하십시오. 그러면 바닥에 나뒹구는 저 더러운 진술서들은 외부로 유출되지 않게 제 선에서 완벽하게 파기해 드리겠습니다. 부장님의 그 알량한 명예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질 퇴직금만큼은 온전히 지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송 부장의 초점 잃은 눈동자가 사직서를 향해 기계처럼 느릿하게 움직였다.


“만약 이 만년필을 쥐지 않겠다면… 이 진술서 열두 장은 내일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춰 사내 그룹웨어 전체 게시판과 언론사 사회부 기자들에게 동시에 뿌려질 겁니다. 평생을 바친 회사에서 부하 여직원을 성희롱하고 직원들을 학대한 파렴치한으로 조리돌림 당하며 불명예스럽게 쫓겨나는 거죠.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선택권이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사형 선고.


여성의 외모와 성범죄 프레임이라는, 이 시대의 가장 치명적이고 반박 불가한 덫에 걸린 송 부장은 짐승처럼 앓는 소리를 냈다. 그는 덜덜 떨리는 두 손을 뻗어 지안이 내민 만년필을 쥐었다.


붉게 충혈된 눈을 비집고 나온 탁한 눈물방울이 툭 떨어져 종이를 적셨다. 치욕과 공포, 그리고 지독한 배신감에 짓눌려, 그는 결국 사직서 하단에 자신의 이름을 갈겨썼다. 펜 끝이 종이를 찢을 듯 떨린 탓에 이름의 마지막 획이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서명이 끝난 종이를 낚아채듯 받아 든 지안은, 오물을 피하듯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의 얼굴에는 다시 온화하고 나긋나긋한 미소가 장착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송태섭 씨.”


직함이 떨어져 나간 이름 세 글자가 밀실의 차가운 공기를 날카롭게 베었다. 지안은 바닥에 쓰러져 오열하는 사내를 철저히 투명 인간 취급하며, 유리창 옆의 문을 열고 취조실을 빠져나왔다.


문밖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재무팀 직원들이 일제히 지안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지안은 그들을 향해 세상에서 가장 자애롭고 아름다운 구원자의 얼굴을 해 보였다.


“여러분. 그동안 저 폭력적인 악마 밑에서 말 못 할 고통을 견디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용기를 내어 주신 덕분에, 이제 태성그룹의 썩은 뿌리 하나가 완벽하게 뽑혔습니다.”


지안의 위로에 몇몇 직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고, 최 대리는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고한 상사의 목에 칼을 꽂았다는 비열한 죄책감을, '우리는 부조리에 맞서 여성과 약자의 권리를 찾았다'는 거대한 집단적 착각으로 덮어버리는 맹목적인 도취의 순간이었다.


지안은 그들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한 뒤, 꼿꼿한 걸음걸이로 복도를 걸어 나갔다.


통유리로 된 복도 창밖으로는 붉게 물들어가는 서울 도심의 빌딩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차가운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완벽하고도 서늘한 얼굴, 선명한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응시하며 조용히 달싹였다.


“자, 다음은 어떤 마녀를 화형대에 올려볼까.”


진실을 지우고 환상을 조작하여 타겟의 숨통을 우아하게 끊어놓는 사내의 이단심문관. 그 아름답고도 치명적인 포식자의 사냥이, 이제 막 첫 번째 피비린내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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