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진짜 하우스

by 연구소장

콰아아아아앙-!!!!


끝을 알 수 없던 칠흑 같은 심연을 뚫고, 마침내 은빛 비상 잠수정 '방주(Ark)'가 포말을 일으키며 수면 위로 솟구쳐 올랐다.


허공으로 튀어 올랐던 잠수정이 다시 바다 위로 거칠게 떨어지며 요동쳤고, 이내 잔잔한 파도 위를 유유히 표류하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아…!"


조종석의 해치가 덜컹거리며 열리자마자, 태현과 유진은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바깥 공기를 미친 듯이 들이마셨다. 폐부를 찌르는 짭조름한 바다 냄새와, 피부에 닿는 상쾌한 자연풍. 심해 벙커의 인공적인 산소나 맹독 가스와는 차원이 다른, 진짜 '생명'의 냄새였다.


"살았어… 우리가, 진짜 살아서 나왔어…."


유진이 잠수정 해치 위로 반쯤 몸을 내민 채, 눈부신 태양을 향해 손을 뻗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안경 너머로 흐르는 눈물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태현 역시 조종석에 등을 기댄 채, 찢어진 코트 사이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맨눈으로 받아냈다. 전신의 상처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지독했던 판옵티콘의 억압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온몸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끝났다.


지옥 같은 데스매치도, 목숨을 건 룰렛도, 수천 명을 짓밟던 기득권의 오만함도 모두 저 깊은 바닷속으로 수장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잠수정에 내장된 구조 신호를 보내고 뭍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우우웅-.


하지만, 생존의 환희를 만끽하던 태현의 귀에 기묘한 진동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지?"


태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단순한 파도 소리가 아니었다. 거대한 엔진이 바닷물을 밀어내는 낮고 묵직한 구동음. 그것은 너무나 거대해서, 바다 전체가 웅웅거리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그 순간.


따스하게 쏟아지던 아침 햇살이, 마치 일식이 일어난 것처럼 순식간에 차단되며 거대한 그림자가 잠수정을 덮쳤다.


"어…?"


햇빛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린 유진의 동공이 찢어질 듯 팽창했다.


해경 경비정이 아니었다. 구조 헬기도 아니었다.


잠수정의 코앞, 파도를 가르며 소리 없이 다가온 것은 산맥처럼 거대한 **'초대형 스텔스 요트'**였다.


길이만 수백 미터에 달할 듯한 압도적인 크기. 모든 레이더 전파를 흡수하기 위해 특수 무광 도료로 칠해진 각진 검은색 선체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한 마리의 거대한 레비아탄(해저 괴수) 그 자체였다. 부호들의 사치품이라기보다는, 최첨단 군사 요새를 요트의 형상으로 위장해 놓은 듯한 섬뜩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저, 저게 대체…."


유진이 말을 채 잇기도 전, 스텔스 요트의 하단부 격납고가 입을 벌리듯 열리더니 거대한 크레인이 내려와 잠수정을 덥석 집어삼켰다.


철컥- 콰앙!


"씨발, 꽉 잡아!!"


태현이 유진의 어깨를 낚아채며 조종석 안으로 몸을 웅크렸다. 잠수정은 저항할 틈도 없이 요트의 내부 격납고로 끌려 올라갔다.


치이이익-


격납고의 물이 빠지고, 잠수정이 묵직한 쇳소리와 함께 바닥에 안착했다.


그리고 해치가 열려 있는 잠수정 위로,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할로겐 조명이 쏟아졌다.


"손들어. 움직이면 즉각 사살한다."


차갑고 기계적인 영어(English).


눈부신 조명 뒤로, 판옵티콘의 흑기동대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무장을 갖춘 백인 용병 수십 명이 레이저 조준기를 겨눈 채 잠수정을 포위하고 있었다. 방탄조끼에 새겨진 문양은 전 세계 분쟁 지역을 휩쓸고 다니는 최상위 PMC(민간군사기업)의 마크였다.


태현은 피투성이가 된 양손을 천천히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의 뇌리가 미친 듯이 회전하고 있었다.


'이사회의 구조대인가? 아니야. 수장 새끼는 지들이 타고 도망칠 거라고 했어. 벙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 전력은 대체 뭐지?'


"나와. 해커도 패드 바닥에 내려놓고 양손 올려."


용병들이 거칠게 태현과 유진의 뒷덜미를 낚아채어 잠수정 밖으로 끌어냈다. 그들은 태현의 코트를 뒤져 남은 무기를 모조리 압수하고, 유진의 품에서 마스터 패드마저 강제로 빼앗았다.


"강태현 씨…."


유진이 공포에 질려 태현의 팔을 꽉 붙잡았다.


"얌전히 있어."


태현은 덤덤하게 대답하며 요트의 내부를 훑어보았다.


용병들에게 등 떠밀려 격납고를 빠져나와 걷기 시작한 요트의 내부는, 그야말로 '역겨울 정도의 호화로움'이었다.


바닥은 최고급 대리석으로 깔려 있었고, 벽면은 루브르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진품 명화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피와 바닷물에 흠뻑 젖은 태현과 유진이 걷는 자리마다 검붉은 발자국이 더럽게 찍혔지만, 용병들은 개의치 않고 그들을 요트의 가장 상층부, VVIP 라운지를 향해 끌고 갔다.


스르륵-


라운지의 거대한 자동문이 열리자, 태현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라운지 전면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수십 미터 크기의 초대형 8K 홀로그램 스크린.


그리고 그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영상은 다름 아닌, **'판옵티콘 벙커가 붕괴되는 생중계 화면'**이었다.


수만 톤의 바닷물이 VIP 라운지를 집어삼키는 장면, 귀족들이 익사하며 버둥거리는 모습, 중앙 타워가 산산조각 나는 끔찍한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여러 개의 카메라 앵글을 통해 영화처럼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스크린 앞.


최고급 가죽 소파에 기대앉아 최고급 돔 페리뇽 샴페인을 홀짝이며,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감상하듯 그 학살극을 여유롭게 지켜보고 있는 대여섯 명의 남녀가 있었다.


그들은 백인, 아랍계, 동양인 등 다양한 인종이었지만, 하나같이 세상의 모든 부를 거머쥔 듯한 나른하고 오만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오. 오늘의 메인 이벤트 우승마(馬)가 도착하셨군."


소파 정중앙에 앉아 있던 은발의 서양인 노인이 시가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가에는 유쾌한 웃음 주름이 패어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먹이를 노리는 파충류처럼 차갑고 섬뜩했다.


태현의 미간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우승마.


지금 저 노인은, 목숨을 걸고 시스템을 붕괴시킨 자신을 '경주마'라고 불렀다.


"이게… 다 무슨…."


유진이 스크린 속 수장되는 수천 명의 사람들과, 소파에 앉아 웃고 있는 자들을 번갈아 보며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설명이 좀 필요한 표정이네."


노인의 옆에 앉아 있던 아랍계 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태현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태현의 젖은 코트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물을 보며 조롱하듯 혀를 찼다.


"아직도 헷갈리나 보지? 넌 지금 막 '판옵티콘'이라는 어항 속에서 가장 끝까지 살아남은 한 마리의 피라냐야."


아랍 부호가 와인잔을 허공에 까딱거리자, 홀로그램 스크린의 화면이 바뀌었다.


화면에는 판옵티콘의 하층민 구역, 시민 구역, VIP 라운지가 각각 구획별로 나뉘어 있고, 각 구역의 생존자 수와 함께 그들 머리 위에 **[배당률]**이 적혀 있는 인터페이스가 떠올랐다.


"판옵티콘. 그건 단순한 지하 벙커가 아니야. 전 세계 최상위 0.001%의 VVIP 오너들이 수백억 달러를 투자해 만든, 가장 자극적이고 완벽한 **'인간 경마장'**이지."


쾅.


태현의 뒤통수를 거대한 망치로 후려치는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


"네가 쳐부쉈다고 믿었던 '이사회의 수장'과 임원들? 그들은 그저 우리가 월급 주고 고용한 이 투기장의 '지배인'이자 딜러들에 불과해. 진짜 '하우스'는 바로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이지."


아랍 부호의 말에 소파에 앉아 있던 남녀들이 일제히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층민 구역에 식량을 끊어 폭동을 유도하고, 귀족들에게 무기를 쥐여주는 건 모두 우리가 리모컨으로 조작하는 '이벤트'에 불과했어. 쥐새끼들이 서로를 물어뜯고 위로 기어 올라오는 걸 보면서, 우리는 누가 가장 먼저 중앙 타워에 도달할지 수백억 달러를 걸고 베팅을 즐겼던 거다."


은발의 노인이 시가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거들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변수가 등장했지. 요람에서 올라온 이름 없는 들개 한 마리가, 딜러들을 모조리 물어 죽이고 게임의 판을 엎어버렸거든. 덕분에 오늘 밤 베팅 판은 아주 엉망진창이 됐지만… 역대 최고의 쇼였음을 부정할 순 없군. 훌륭했어, 강태현."


노인이 태현을 향해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며 건배를 제안했다. 마치 검투장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검투사에게 황제가 찬사를 보내는 듯한, 지독한 오만함이었다.


"……."


유진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신들이 피를 토하며 싸웠던 모든 투쟁, 체제에 대한 저항, 그 모든 것이 그저 저 부자들의 여흥을 위한 '스크립트 없는 리얼리티 쇼'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그녀의 멘탈이 완전히 붕괴되어 버렸다.


태현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랍 부호가 비웃었다.


"절망할 거 없어. 넌 그래도 유일하게 살아남아 우리 눈에 든 특별한 경주마니까. 네가 원한다면 이 요트의 바닥 청소부나, 우리 집안의 사설 경호원 자리쯤은 하나 줄 수…."


"큭… 크하하하하하!!"


돌연.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태현의 입에서, 미친 듯한 폭소가 터져 나왔다.


"뭐가 그리 우습지?"


노인의 미간이 불쾌하게 찌푸려졌다.


"크하하… 아, 미안. 웃으면 안 되는데."


태현이 핏발 선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절망이나 공포는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타짜의 얼굴이었다.


"내가 카지노에서 일할 때 말이야. 판돈 크게 걸고 잃은 호구 새끼들이 꼭 하는 변명이 있어. '난 잃은 게 아니라, 그냥 게임비를 낸 것뿐이다. 이깟 돈 없어도 그만이다'라면서 쿨한 척 오지게 하거든."


태현이 자신을 겨누고 있는 용병들의 총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과 VVIP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용병들이 총을 장전하려 했지만, 노인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이 미친 경주마의 헛소리를 끝까지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판옵티콘을 투기장으로 만들었든 말든 그딴 건 내 알 바 아니야. 내가 궁금한 건 딱 하나지."


태현이 피 묻은 코트의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용병들이 긴장하며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지만, 태현의 손에서 나온 것은 무기가 아니었다.


탁.


태현이 VVIP들의 대리석 테이블 정중앙에, 묵직한 검은색 동전 하나를 던져놓았다.


표면에 미세한 양자 회로가 각인된, 마에스트로에게서 빼앗고 중앙 타워의 락을 해제할 때 사용했던 절대 권력의 인장. **'블랙 칩'**이었다.


"이게 뭔지 알지? 벙커 지배인 새끼한테서 내가 합법적으로 '딴' 칩이야."


태현이 양손을 테이블 짚고 몸을 숙이며, 노인을 향해 악마처럼 웃었다.


"너희가 진짜 이 하우스의 오너(Owner)라면. 게임에서 이긴 손님이 칩을 들고 왔을 때, 환전(Cash Out)을 해주는 게 기본 룰 아니야?"


순간, VVIP 라운지에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블랙 칩. 그것은 단순한 보안 키가 아니었다. 벙커에 묻혀있던 모든 기득권의 자산과, VVIP들이 베팅 판을 굴리기 위해 묶어두었던 수조 원 단위의 불법 자금 네트워크에 접근할 수 있는 물리적 마스터키였다.


그들은 태현을 구출한 것이 아니라, 그가 들고 있는 저 '블랙 칩'을 회수하기 위해 요트를 띄운 것이었다.


"환전이라."


은발의 노인이 미소를 지웠다.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고 잔혹하게 가라앉았다.


"경주마 주제에 건방지게 기수(騎手)의 지갑을 요구하는군. 내가 지금 당장 저 용병들에게 네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그 칩을 줍게 하면 그만인데."


"해봐."


태현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맞받아쳤다.


"저 뒤에 엎어져 있는 해커 아가씨가, 아까 잠수정에서 심심하다고 이 칩 안에 재미있는 코드를 하나 심어놨거든. 내 심박수가 멈추거나 칩에 물리적 충격이 가해지는 순간, 칩 안에 들어있는 너희들의 불법 자금 장부와 판옵티콘의 VIP 명단이 전 세계 언론사 메일로 1초 만에 쏴지도록 말이야."


허세일 수도, 진실일 수도 있는 완벽한 블러핑(Bluffing).


하지만 수조 원의 돈과 자신의 명예가 걸린 기득권들은 그 1%의 리스크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은발 노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원하는 게 뭐지."


"뭘 물어. 타짜가 카지노에 들어왔으면."


태현이 의자를 빼고 노인의 정면에 당당하게 털썩 주저앉았다. 피투성이가 된 짐승이, 전 세계를 주무르는 진짜 포식자의 식탁을 강제로 강탈한 것이다.


"마지막 파이널 테이블(Final Table)을 쳐야지."


태현이 대리석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내 판돈은 이 블랙 칩과, 나와 저 녀석의 목숨. 너희들 판돈은 이 칩에 들어있는 수조 원의 불법 자금 전부. 그리고 우리가 무사히 이 요트에서 내리는 완전한 자유."


이것은 더 이상 생존 게임이 아니었다.


세계 최정점의 자본을 상대로, 모든 것을 빼앗고 파산시키기 위한 궁극의 데스매치.


"패 돌려, 오너 새끼들아. 환전소 문 닫기 전에."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거대한 스텔스 요트 위에서.


진짜 하우스의 주인을 끌어내리기 위한, 강태현의 마지막 도박판이 장막을 걷어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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