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크
다음 날. 수능이 끝났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제의 폭풍 같던 정신상태는 온데간데없이 나는 기쁨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등교를 하는 동안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만나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계단을 올라 반으로 가다가,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는 울상이 된 얼굴의 같은 반 친구가 있었다.
응.
나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내 어깨를 잡고 망했다며, 자기는 재수를 하게 생겼다며 말했다. '네가 망치면 얼마나 망치겠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만한 아이였으니까. 근데 그가 말하길 자신의 영어등급이 4등급이라는 것이다. 놀랐다.
놀라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와 같은 대학교의 같은 학과를 지망하던 친구는 국어를 제외한 전 과목이 1 또는 2등급이었다. 진심으로 기뻤다. 그래, 너 먼저 가라...라고 장난식으로 말하려는데, 그가 자신의 예상 국어 등급을 말하는 순간 그 문장이 들어갔다. 음, 4보다 낮은 등급이었다. 그가 목표를 성취하지 못한 것과는 별개로, 그가 존경스러웠다. 그는 나와 다르게, 1교시를 망치고도 정신을 부여잡고 자신의 고점을 성취한 것이었으니까. 나와는 대비되는 모습. 실망의 표정이 역력한 그를 보며, 어쩌면 잘 된 세계선의(?) 내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아무튼 그가 국어를 망친 건 충격이었다.
이 외에도 잘 볼 줄 알았던, 아주 뛰어난 친구들이 하나 둘 자신이 망했음을 말할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이들의 망했다의 기준이 나의 성공했다의 기준일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아무튼 재수를 있다는 생각한다는 건 자신의 성적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다는 뜻. 이런 친구들이 많음에 나는 놀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묘하게 기쁘기도 했던 것 같다. 나만 망친게 아니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수험생들을 위로한답시고(?) 나눠주는 맛없는 핫도그를 나눠 받고 학교는 끝이 났다.
나는 집에 가지 않고 그 길로 동네 정형외과에 갔다. 사실 수능 2달 전부터 허리가 아팠다. 어느 순간부터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앉을 때나 일어날 때, 매우 매우 아팠다. 수능 전에 갔다가 괜히 큰일이면 일이 커져 공부에 방해될까 봐 겁이 나서 가지 않았는데,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을 열고 차례를 기다렸다. 원장님이 할머니와 말을 놓고 티키타카하는 내용이 재밌어 귀담아듣고 있었다.
마사지받고 가. 처음 1회만 비싸고, 그 뒤론 3천 원이야.
얼만데.
6천 원.
... 너무 비싸.(말투로 봐서 손사래를 치며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알겠어. 약국 가서...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6천 원이 비싸다고 하시는 모습에 약간 마음이 아팠다. 가만 생각해 보면 정말 비싼 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대화를 듣던 중, 나의 이름이 불렸다. 힘겹게 일어나 간호사를 따라간 나는 엑스레이를 찍었다. 찍는 내내 불안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픈 고통의 형식, 그리고 2개월이 넘는 지속시간을 볼 때, 분명 작은 일은 아닐 것 같았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할머니는 사라지고 없었다. 몇 초 뒤 내 이름이 불려 원장실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저번에 오셨었죠?
네에.
수능 끝난 건가?
네. 끝났어요.
그렇군요.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엑스레이 사진을 띄우며) 여기 간격 보이시죠? 이게 디스크일 수 있거든요. Mri 찍어보셔야 할 수도 있어요.
디스크. Mri. 상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지고 있었다.
일어나 보세요.
(이런저런 자세를 시키며) 아프세요?
네.
으음.... 디스크 맞네요.
디스크 같은데, 도 아니고, 디스크 맞네요 였다. 단정 짓는 말. 당신은 디스크입니다, 땅땅땅. 선고받은 것이다. 이윽고 신경주사 어쩌고 하며 그는 말을 이어갔다. 들리지 않았다. 수능을 잘 봤다면 모를까, 망친 시점에서 병원비까지 부모님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죄송한 일이 아닌가. 그들이 괜찮다 해도 내가 용납이 안 됐다. 디스크가 아니겠지. 저 양반이 잘못 말하는 걸 거야,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우선 부모님과 이야기해 보고 다시 오겠다고 매듭을 짓고, 간단한 물리치료를 받고 (아마 할머니가 거부하셨던) 약국에서 약을 받고 나갔다.
거짓말이겠지. 애초에 Mri를 찍어야 안다고 자기가 말해놓고 왜 디스크라 단정 짓지? 신경주사는 또 뭐고. 돈독 든 의사네, 완전.
집에 가까워질수록 그가 무례하다는 생각이 커져만 갔다. 우리 가족의 제정 여부와는 별개로, 수능을 망친 시점에서 부모님께 병원비까지 부담 주고 싶지 않았다. 아마 잘 봤다면 웃으며 당당하게 저 디스큽니다ㅡ라고 외칠 수 있었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반쯤 울먹이며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