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성인 (3)

by 김규민

1교시를 망친 시점에서 나는 내가 아니게 되었다. 그간의 공부가,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패륜을 저지른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나는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고, 이후 이어지는 수학 영어를 망치며... 스스로를 매도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 자신 있다고 떠들어대던 논술 최저나 맞출 생각으로 임했다면 내 미래는 지금과 다를지도 모를 것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당시의 나에게는 그런 생각을 할 이성이 없었던 모양이다.


점심시간에 엄마가 챙겨주신 도시락을 꺼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점심의 메뉴가 기억나지 않는다. 죽이었는지, 볶음밥이었는지. 다 먹었는지조차 모호하다. 별로 중요한 정보는 아니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당시의 나는 정말로 정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영어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난이도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멘탈이 나간 시점에서 그런 건 오히려 느껴지지 않았다. 느낄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아무리 기억을 끄집어내려 노력해 봐도 점심시간 이후의 기억, 영어를 포함한 사탐 과목을 치른 시점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다. 사람들이 의외로 화장실을 자주 오고 갔다 정도? 그렇게 우울한 시험이 끝나고, 나는 고사실을 떠났다.


수능이 끝나고 하굣길에 은퇴한(?) 전교 회장을 만났다. (같은 학교였기에. 사실 그는 1교시가 끝나고 나를 찾아와 어땠냐고 물어봤다. 나는 괜찮았다는 식의 거짓말을 치고 화장실에 갔지만.) 수능을 끝내고 처음으로 나눈 친구와의 대화였다.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말로는 망쳤다고 말하긴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누가 봐도 우울해 보이는 사람 앞에서 누가 자신의 결과가 좋다고 말하겠는가. 게다가 내가 아는 그는 시험을 망치면 그것에 대한 실망감이 얼굴에 묻어 나오는 사람이었다. 그의 표정은 괜찮았다. 부모님에게 전화를 하는 그의 옆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스마트폰, 나도 가져올걸, 따위의 생각을 하며.


얄궂게도 버스는 9분이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았고, 그동안 나는 벌새 같은 무언가를 보며 '시험이 끝나고 보는 새가 벌새라니, 뭔가 위로가 되네' 따위의 얼빠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건 박각시나방이었다. 우리나라에 벌새는 없다고 하더라).


20분 가까이 벌새 같은 박각시나방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며(친구는 목적지가 바뀌었다며 떠난 상태였다). 부모님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했다. 핑계 따윈 당연히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쩐다. 말은 당연히 할 거고, 그럴 건데... 어쩐다.


내 인생 최저점이 예상되는 시험이었다. 그동안 학교에서 본 그 어떤 모의고사도, 학원에서 본 어떤 사설 모의고사보다도 처참한, '어나더 레벨의'성적이 예상되었다.


집에 도착하자 피자를 시킨 가족들이 나를 반긴다.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내가 치른 수능이라는 이름의 의식에 대한 감상을 말한다. 부모님은 당연히 웃지 않으셨다. 그저 그래도 수고했다고 말씀하시며, 어색한 침묵 속에서 나는 아무 맛도 나지 않는 피자를 입에 우겨넣어야 했다. 친구들은 단톡방에서 과목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나는 그날 일찍 잠에 들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