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셰이프 오브 워터 단평

<하이힐 신은 인어 이야기>

by 조성현

주인공 엘라이자의 직업은 청소부이다. 그녀가 말을 할 수 없는 장애를 가졌고 목에는 아가미 형상의 흉터가 있다는 특이점 이외에 이목을 끄는 부분은 바로 항상 그녀가 굽높은 하이힐 신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괴이한 포인트이다. 청소부로서 항상 물을 가까이 해야만하는 직업적 특성을 가진 그녀에게 있어 굽이 있는 신발은 직업에 그다지 어울리는 신발이 아니다. 스트릭랜드의 잘린 손가락은 엘라이자가 바닥에 양동이에 찬 물을 뿌림으로서 발견된다. 바닥에 흥건한 피를 닦아내기 위해 물을 뿌리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종종 해야만 하는 일이었을 것임이 자명하다. 물이 흩뿌려진 바닥은 하이힐을 신고 돌아다니기엔 다소 위험하다고 인식될 정도로 적합한 환경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감독은 엘라이자에게 일하기에 불편한 신발을 굳이 신겼을까. 그저 배우 개인의 미학을 위한 안전불감증일 뿐인걸까.


엘라이자가 노신사 자일스와 나란히 앉아 TV를 보는 순간, TV 화면 속에는 '계단춤'이라는 것이 방영된다.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TV 모니터를 길게 잡아줌으로써 구두를 수단으로 삼아 일정한 리듬을 만들어내는 장면을 관객에게 선보인다. 엘라이자와 자일스는 앉은 자리에서 그 리듬에 맞추어 자신들의 구두로 바닥을 두드리고 신발끼리 맞부딪혀 일종의 '하이파이브'와 같은 동작을 보인다. 마치 하루 이틀 해본 일이 아닌듯, 그들의 리듬은 일정하고 손발은 척척 맞는다. 그 환상의 호흡으로 만들어낸 작은 퍼포먼스가 끝난 뒤에 둘은 웃는 얼굴로 그들만의 '대화'를 마무리짓는다.


사실 영화는 드러내놓고 엘라이자에게 구두를 의도적으로 신겼노라는 신호를 여러차례 준다. 그녀가 복도에서 리듬을 만드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녀의 구두신은 발을 클로즈업한다. 뿐만 아니라, 엘라이자의 출근길이 관객에게 처음으로 조망되는 순간, 버스를 기다리는 엘라이자는 가게 진열대의 구두를 바라본다. 이러한 점에서 바라본다면 농인인 엘라이자에게 있어 구두는 그녀가 소리를 만들어내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임과 동시에 소통하고자 하는 욕망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구두는 그녀의 고독만을 상징하는 것인가. 그녀가 연인이 되는 인어(라기보다는 양서류 인간에 가까운 디자인이긴 하지만)를 만나는 장소가 어느 곳인지 생각해본다면 이 또한 의미심장해진다. 하이힐은 본질적으로 불편한 신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에서 많은 여성들이 이 신발을 착용한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등의 중요한 자리가 있을 때 여성들은 하이힐을 착용한다. 즉, 하이힐에는 미용의 목적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엘라이자에게 있어 랩은 직장인 동시에 연인과 마주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청소부로서 입어야만 하는 유니폼 외에 엘라이자가 자신을 치장하도록 허용된 수단은 오로지 그녀의 구두뿐이다. 소통의 수단으로 쓰이던 구두를 신고 그녀는 양서류 인간의 앞에 머문다. 그 순간 구두의 기능은 소통의 수단인 동시에 치장의 수단이다.


엘라이자의 욕망과는 별개로 그녀는 명백한 소수자로서 주류에게서 밀려난 존재다. 단순히 그녀가 말을 하지 못 하는 장애를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스트릭랜드로 상징되는 주류는 백인, 남성, 기독교 근본주의 그리고 코뮤니스트들에 대한 적개심을 지닌 이들이다. 엘라이자는 이 주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녀의 절친은 흑인 여성인 젤다이며 특정 신앙에 매몰된 모습을 보이지도 않는다. 인어를 살리는 조력자인 드미트리가 소련의 스파이인지 아닌지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다.


엘라이자가 인어에게 어째서 매료되었는지는 그녀 스스로 설명한다. 인어는 애초에 인간과 말을 섞을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녀가 장애를 가졌다고 인식하지 못한다. 그에게 있어 엘라이자는 평범한 인간이다. 정확히, 인어는 엘라이자를 자신과 동류로 바라본다. 둘은 모두 인간의 언어를 소리낼 수 없으며 사회의 일반적인 기준에 충족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둘은 스트릭랜드에게 다른 방식의 폭력을 행사당한다. 인어는 육체적으로 학대를 당하며, 엘라이자는 성적인 희롱을 당한다. 스트릭랜드로 상징되는 '주류의 시선'에서 그들은 그렇게 대해도 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엘라이자가 처음부터 인어였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그녀가 어째서 강 주변에서 버려진 채로 발견이 되었는지, 목덜미엔 어째서 일정한 형태의 흉터가 나있는지, 어째서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가 있는지 등이 전부 설명이 된다. 물에 잠긴 꿈을 꾸는 것을 그녀의 잠재의식 속 근원에 대한 향수로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를 인어로 정의하는 순간 모든 것은 설명이 된다. 인어에게 주류에 속한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인어는 인간의 세상과는 괴리된 다른 세상의 존재들이고 다른 종족으로서의 삶을 향유하는 존재들이다.


하이힐을 신음으로서 엘라이자는 인간의 세상 속에서 소통을 하고 치장을 하며 섞여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본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준다는 나신의 인어를 만나는 순간, 그녀에게 더이상 겉치레는 중요치 않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양서류 인간과 살아가는 운명으로 나아가게 된 엘라이자의 발에서 구두가 벗겨진다. 이제 엘라이자는 고독하지 않다. 소통의 수단으로서 구두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 말을 하지 못 하는 자신을 장애를 가진 이라고 생각지도 않는 인어 앞에서 그녀는 더 이상 치장할 필요가 없이 본연의 모습으로 함께 살아가게 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박찬욱 장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