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오랜만에 어릴 적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내가 처음으로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느낀 사건이다.
한 살 터울 연년생이었지만 엄마는 늘 나에게 동생을 챙기라고 했다. "내가 없으면 니가 엄마야." 실제로 엄마가 없을 때가 많았고, 내가 엄마일 때가 많았다. 엄마는 미술학원을 하느라 바빴다. 아빠는 실직 후 술을 마시며 괴로워하느라 바빴다. 동생은 너무나 어리고 작았다. 미술학원에서 제일 작은 애였다.
"얘~ 너 너무 귀엽다" 아이들은 마음대로 동생을 쓰다듬었고, 동생은 승질을 부리며 울어댔다. 동생이 그러고 나면 내가 엄마에게 끌려가 아이들 앞에서 혼이 났다. "너 동생도 하나 못 챙겨?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나는 늘 24시간 동생을 주시해야 했고, 친구를 사귈 수도 없었다. 친구들이 소꿉놀이, 병원놀이를 하자고 하면 눈치를 보며 '동생도 같이 해도 돼?' 하고 물었다. "걔는 너무 어리잖아." 친구들은 나를 끼워주지 않았다.
학원은 수강생들이 너무 많아서 우리가 마땅히 있을만한 곳도 없었다. 그런 날에는 추운 겨울 동생 손을 잡고 동네 놀이터를 전전했다. 우리 아파트는 낡고 오래된 아파트라 놀이터가 없었는데, 다른 아파트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으면 덩치 큰 아이들이 몰려와 "우리 아파트에서 놀지 마!" 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동생과 나는 다른 아파트에 있는 놀이터들을 전전했다. 집으로 가면 술에 취한 아빠가 거실에 앉아 있고, 학원으로 가면 엄마가 짜증을 낼 것 같고, 정말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 세상 어디에도 갈 곳 없는 그 마음은 지금의 내 마음과도 닮아 있다는 생각.
어느날 동생이 말했다. "누나, 나 트램펄린 타고 싶어." 트램펄린 주인아저씨 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이고 덩치가 아주 컸다. "우리 돈 없어." 동생이 트램펄린을 타고 싶다고 징징댔다. "그럼 잠깐 올라갔다가 바로 내려오는 거야" 나는 키작은 동생을 먼저 트램펄린 위로 올려주었다. 혹시나 주인아저씨 아들이 이 모습을 보면 어쩌지 싶어서 손이 덜덜 떨렸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야!!!" 아니나다를까, 주인아저씨 아들은 500원을 내지 않고 트램펄린 위에 올라간 우리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다. 경찰이 잡아가면 어떡하지. 감옥에 갇히게 되면 어떡하지. 나는 트램펄린 위에서 동생을 내릴 생각조차 못하고 도망쳤다. 동생은 트램펄린 위에서 엉엉 울고있었다. 주인아저씨 아들은 왜 돈을 안내고 타냐며 동생에게 욕을 했다. 동생을 구하지 못한 일, 비겁하게 먼저 도망쳐버린 일, 그게 내 인생 첫 번째 죄책감이고, 나는 오랜 시간 이 기억으로 가슴아파했다.
***
집에서도 그렇고 어느 조직에서나, 단체에서나, 은연중에 첫째의 역할을 맡았다. 누군가를 챙기는 일. 대학교 때 MT를 가면 늘 마지막까지 남아 설거지를 했다. 내 몸도 엉망진창이면서 술먹고 토하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챙겼다. 학교에서는 가장 먼저 강의실에 가서 마이크를 세팅했다. 가족이 아프면 새벽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까지 고속도로를 내리 달려야 했고, 응급실에서 사설 구급차를 구하는 것도 오롯이 혼자만의 일이었다. 취업하고도 마찬가지였다. 늘 내가 가는 팀은 사수가 없었다. 신입인데 경력처럼 일하기, 남이 싸놓은 똥치우기, 팀장이 정리 못하는 일 스스로 해결하기,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팀 가산점 챙기기. 희한하게도, 사람은 어쩜 이렇게 반복적인 삶을 살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환경과 사건과 사람이 다를 뿐. 비슷한 모습으로, 반복적이게.
"내가 없으면 니가 엄마야." 어릴적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