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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리 Dec 17. 2024

세상이라는 건 고통으로 만들어진 긴 터널 같았다

"잘 지내셨어요?"

의사선생님은 오늘도 웃으며 나를 맞아주셨다.

"네... 아, 아니요."

"일주일 간 어떠셨나요?"


사실 지난 일주일은 나에게 너무나 힘든 한 주였다. 아침 약을 먹으면 하루종일 기분이 가라앉았다. 기분을 0에서 100으로 수치화할 수 있다면, 오전과 오후는 30의 상태로 유지되다가 밤이 되면 0으로 떨어졌다. 이유없이 눈이 퉁퉁 부을 만큼 눈물이 났다. 3~4시간 내리 울고 지쳐 잠이 들었다. 취침전 먹는 약은 나를 불면증과 악몽으로부터 지켜주었다. 하지만 간간히 악몽을 꾸기도 했는데, 차로 사람을 치는 꿈을 꾸곤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신체적 증상들(두통, 발열, 어지럼증, 기침, 구토, 불면증, 극심한 근육통 등등)은 점점 사라졌다. 6개월 간 나를 따라다니던 기침이 정신과 약으로 없어지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세상에 스위치가 있다면 그냥 꺼버리고 긴긴 잠을 자고 싶어요. 쉬고 싶어요."

"환자분께는 휴직이 답일 수도 있어요. 너무 쉬지 않고 달렸고,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쳤어요."

"그런데 선생님, 저는 쉬면 안돼요."

"왜 안되죠?"

"쉬면... 죄책감이 느껴지니까요. 불안해요."


의사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내 심연 속의 문제가 무엇인지 어슴푸레 깨닫게 된다. 노오오오력만 강요하는 이 사회에서, 경쟁에 지쳤구나, 나를 돌보지 않았구나, 날 너무 몰아세웠구나. 좋은 고등학교에 가려고 아등바등, 좋은 대학교에 가려고 아등바등, 좋은 스펙 쌓으려고 아등바등, 좋은 회사 들어가려고 아등바등... 아직은 하지 못한 결혼과 육아까지... 삶은 끊임없는 숙제이고, 세상이라는 건 고통으로 만들어진 긴 터널 같았다. 이 길을 걷고 또 걷고, 지치지 않고 끝없이 걸어봤자, 터널의 마지막 종점엔 쓸쓸한 죽음만 남겠지.


"요즘말로 현타라고 하죠? 환자분은 그동안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다가 문득 깨달은 거예요. 이렇게 살아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제는 정말 쉬어야 해요."

"네... 하지만 전 쉴 수가 없어요."

"환자분은 왜 열심히 일하려고 해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잘리나요?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태업해버려요! 뭐하러 열심히 일해요!"


괜찮다, 괜찮다 말해주시는 유일한 분. 쉬는 것도 괜찮다,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다, 아무것도 안해도 괜찮다, 그냥 이대로 괜찮다. 의사선생님은 삶에 쉼표가 필요함을 계속 말씀하셨다. 우리 아빠가, 우리 엄마가, 회사 사람들이, 단 한번이라도 이런 말들을 나에게 해주었더라면, 난 이렇게까지 망가지지 않았을텐데.


갑자기 내리는 비도 내 탓, 본인의 불행도 내 탓, 오지 않는 기차도 내 탓, 홍보팀의 실수로 엠바고가 안지켜진 것도 내 탓, 일곱번이나 보여준 자료를 본인이 기억못하는 것도 내 탓. 본인이 사장님께 보고를 잘 못드리고 온 것도 내 탓. 본인이 일하기 싫은 것도 내 탓. 모두가 날 탓하고 비난할뿐, 나의 노력에 감사할 줄 몰랐다.


"기분이 너무 다운된다고 하시니 기분을 살짝 올려주는 약을 넣었어요. 다음주에 뵐게요."


약봉투를 들고 병원에서 나와 차 안에서 펑펑 울었다. 하... 거지같애. 다 그만하고 싶어.

제대로된 아이템도 없으면서 추운 겨울날 전쟁터에 나가 죽어라 싸우다가, 완전히 팔다리를 잃은... 군인의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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