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 3 대장: 탐(貪) 진(瞋)치(癡)

by 향글

얼마 전, 전 직장 직원들과 점심 먹을 기회가 있었다. 마침 호주로 이민을 갔던 직원이 잠시 한국에 다녀오느라 나와서, 우연히 시간이 맞아 함께하는 자리는 더욱 반가웠다. 모인 네 명 중 한 명만 계속 그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나머지 세 명은 각자의 진로로 뿔뿔이 흩어졌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로 예의를 갖춘 사람들의 모임이 더 편할 때가 있다. 허물없는 친구 사이도 좋지만, 어떨 때는 너무 가까운 나머지 필터링 없는 솔직함에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가끔은 나도 모르게 생긴 질투를 은근히 내비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근황 이야기, 건강 이야기, 아이 키우는 이야기 등 가벼운 주제로 수다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에 전 직장을 계속 다니고 있는 직원이 고민거리가 있다며 이야기를 꺼낸 순간, 모든 시선이 그 직원의 이야기로 집중되었다.


고민의 내용인즉, 이번에 승진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동안 같이 일했던 직원과 불편한 사이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같이 호흡을 맞췄던 그 상대 직원은 부탁이라는 명목으로 업무(특히 본인이 하기 싫어하는)를 하달하면서 은근히 상사 노릇을 해왔는데, 고민녀가 승진을 하게 되니 약간 비슷한 레벨이 되어간다고 느꼈는지 고민녀의 승진을 반기는 눈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고민녀는 근면성실하기로는 남부럽지 않지만, 너무 의기소침하여 경쟁을 해야 하거나 나서는 자리가 생기면 몹시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이 단점이다. 그러던 그녀가 승진을 하게 되니, 상대 직원이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더 위계를 정립하려고 하고 관계가 서먹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머지 셋은 이구동성으로 고민녀를 응원하며,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며 상대 직원의 기세에 눌리지 말 것을 조언했다. 그리고 요구 사항이 있으면 당당하게 말하고 더 자신감을 가지라고 했다. 힘을 실어주고 싶었고, 진심으로 그녀가 자신감을 갖길 바랐다.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할 때 우리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마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물론 진심을 담아 조언을 하지만, 내가 하는 조언을 실행하는 사람은 나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의기소침해서 지내왔는데, 조언을 듣고 하루아침에 용기가 솟아나지는 않을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그래, 나도 이제 관리자처럼 카리스마 있게 직원들을 대할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직원들을 대면하는 상황에 닥치면 머리가 하얘지고 가슴이 답답해져 올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고, 상황이 나로 하여금 기대에 부응하도록 만들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나는 준비되었다'라는 믿음으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며 두려움을 뚫고 나가는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의연하게 가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이렇게 쉽게 조언할 수 있어도, 나 자신에게는 쉽게 조언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그런 경험을 참 많이 해왔다. 머리로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만 생각한 대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상황. 결혼할 때도 이런 고민을 했었고, 직장을 고를 때도, 회사에서 제안한 기회를 두고 고민을 할 때도 그랬다.


재미는 없지만 사람 하나는 진국인 성실남과, 매일이 새로운 도전과 모험인 매력남을 두고 친구가 고민을 한다면, 나는 성실남과 결혼하라고 조언을 할 것이다. 매력남을 포기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 내 친구이므로,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조언할 것이다. 높은 급여와 내세울 만한 직급을 가질 수 있는 명예 포지션과, 편안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재밌게 일할 수 있는 소박한 포지션 사이에서 고민하는 친구가 있다면, 난 명예 포지션을 선택하라고 할 것이다. 명예 포지션을 선택한 후 뒤에 따르는 가시밭길 행군은 내 몫이 아니므로.


나 자신에게 조언하는 것이 힘든 이유는 나의 욕심 때문이다. 내 선택으로 인하여 버려지는 다른 선택지를, 나는 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성실남을 택해서 안정감 있게 살고 싶지만, 매력남과 연애 같은 결혼생활을 하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돈도 많이 벌고 마음 편하게 일하고 싶지, 구설수에 오르고 책임도 져야 하는 고행을 자처하며 일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좋은 것만 선택해서 가지고 싶은 나의 욕심 때문에 무슨 결정이든 항상 어렵기 마련이다.


욕심 때문에 어느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선택하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서 정체되고 마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의 요인, 탐진치.

탐(貪): 욕심, 집착

진(瞋): 분노, 미움

치(癡): 무지, 착각


아마도 이 세 가지 요인으로 나는 평생 괴로울 것이다.

20, 30대보다는 조금 나아졌을지언정, 나는 아직 욕심을 버리지 못했으니까.

번뇌를 벗어나려면 탐진치를 버리면 된다. 친구에게 조언을 하듯, 간단하다.

그런데 이런 탐진치가 없으면 내 인생이 굴러가지 않는다.

인생은 반듯한 줄을 가운데 두고 이리 치우치고 저리 치우치면서 지그재그로 가는 것이다.

Unsplash의Dennis Haug

나이가 들어서 조금 배운 게 있다면, 나의 이런 욕심을 직시하는 것이다. 착한 척, 청렴한 척, 열심인 척 꾸며대지 않고, 오늘까지 나를 있게 한 욕망을 또렷이 마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이 지금 나에게 도움이 될지 해가 될지는, 그때 가서 보면 알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