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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텔라 병문안

담담하고 포근한 위로

by 녕인

초등학생이었을 때였다.

그 무렵 나는 목 수술을 앞두고 있었고, 무려 3주나 되는 긴 시간을 입원해야만 했었다.


입원실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이었다.

창밖 풍경은 매일같이 같은 방향으로 느릿하게 흔들렸고, 복도 끝 자동문은 조용히 열렸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닫히기를 반복했다.


매일 보는 똑같은 사람들, 하루에 두세 번씩 찾아오는 따가운 주사와 그로 인해 점점 늘어나는 멍자국들,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운 환자들의 눈빛, 그리고 재미없는 동화책과 신문지가 머리맡에 점점 쌓여갔다.


공기마저 반복되는 듯한 그 곳에서 나는 하루하루를 견디듯, 매일 같은 자세로 버텨야만 했다.

가끔씩 들르는 부모님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동안의 외로움을 쏟아내듯 짜증을 냈다. 조금만 불편해도 울고 토라졌으며, 나를 더 자주 찾아오지 않는 부모님이 괜스레 원망스러웠다.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부모님께서는 온갖 응석과 짜증을 받아주셨지만, 그것조차 내가 어딘가 모자라고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어 더 우울해질 뿐이었다.


병원에서 꼬박꼬박 나오는 삼시 세 끼는 끈끈한 미음죽과 소량의 반찬이 전부였다. 한창 맛있는 것만 먹고 싶을 나이였던 나는 그것이 너무 싫어 매번 죽그릇을 뒤적이다가 결국 차게 식고 나서야 몇 숟갈 뜨고는 힘없이 돌아눕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께서는 평소보다 밝은 얼굴로 나를 찾아와, 화사한 노란색의 꾸러미 하나를 내게 보여주시며 말씀하셨다.


"이것 봐, 병원에서 이제 카스텔라는 먹어도 된대. 신나지 않니?"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카스텔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피자빵이나 소보로빵이라면 모를까, 평소 좀처럼 사 먹지 않던 탓에 카스텔라가 무슨 맛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할 지경이었으니까.


그런데 모든 게 흰색인 이곳에 갑자기 들어선 샛노란 상자 때문이었을까. 나는 문득 호기심이 들어 오랜만에 몸을 벌떡 일으켜 자세를 고쳐 앉고 물끄러미 상자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웃으며 포장지를 벗겨내고는 말씀하셨다.

"아플 때 잘 챙겨 먹어야 빨리 낫는대. 우리 딸도 카스텔라 많이 먹고 얼른 나았으면 좋겠다."


상자를 열자 드러난 포슬포슬한 겉모습. 연노란색 반듯하고 정갈하게 잘린 보송보송한 카스텔라 조각들이 마치 나보고 빨리 나으라며 웃음 짓는 듯했다.

칼로 자른 단면을 포크 끝으로 살며시 눌렀다.

포근한 개나리빛 카스텔라는 천천히 꺼졌다가, 마치 숨을 고르듯 다시금 부드럽게 원래의 모양으로 되살아났다.


한 입 먹자마자 느껴지는 고운 식감과 곧이어 한꺼번에 밀려오는 고소하고 묵직한 단맛이 마른 입안을 순식간에 와르르 적셨다.


'카스텔라가 원래 이렇게 달았나?'


평소 빵집에 가면 화려하고 자극적인 빵들에 가려져 눈길도 가지 않던 평범한 빵이었는데. 딱딱한 병실 침대에 앉아서 먹는 카스텔라는 깜짝 놀랄 정도로 부드러웠으며, 왜인지 무척이나 다정하게 느껴졌다.


내가 잘 삼키는지 물컵을 들고 조심스레 지켜보는 어머니의 얼굴을 한번 보고, 부드러운 카스텔라를 입에 가득 넣고 씹다 보니 문득 눈물이 뭉글뭉글 밀려왔다.


'엄마한테 짜증 내지 말걸 그랬어...'


미안한 마음이 카스텔라와 함께 마음속에 차곡차곡 내려앉았다. 지금 가장 힘든 것은 엄마일 텐데. 바쁜 와중에도 나를 가장 많이 보러 와주는 건 엄마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보드라운 카스텔라를 눈앞에 두고도 한 입도 먹지 않고 그저 나 잘 먹는지 지켜보는 엄마의 모습에 나는 그만 우유에 빠진 카스텔라처럼 엉엉 울고 말았다.

밤이 되자 병실에는 이름 모를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몇 조각의 옅은 불빛만이 남겨졌다.
낮에 먹었던 카스텔라 속에 촘촘히 스며든 설탕 알갱이들 때문이었을까. 항상 초저녁이 오기도 전에 잠들었던 나였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맑은 정신에 오래도록 병실 천장을 말똥말똥 바라보았다.


문득 침대 맡에 혼자 남겨진 카스텔라가 생각이 났다. 어둠 속에서 살그머니 일어나 상자를 열자, 얇은 비닐이 어스름하게 보이며 고소한 향이 코끝을 톡 건드렸다. 엄마의 손을 잡았을 때처럼 보드라운 결이 손끝에 닿자, 나는 말없이 눈을 가만히 감았다.


누군가의 정성, 누군가의 마음, 그리고 한 조각의 시간.

이런 것들은 카스텔라와 꼭 닮아서, 바쁘고 자극적인 일상 속에서는 꼭꼭 숨어 있다가, 시간이 잠시 멈추고 모든 감각이 또렷해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선명하고 달콤하게 다가온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늘 곁에 있어 당연하게 여겼던 엄마의 사랑이 아프고 힘들었던 그때 유난히 짙고 따뜻하게 느껴졌던 건.

세상 그 무엇보다 부드럽고 달콤했던 그날의 카스텔라처럼, 엄마의 사랑 역시 무겁게 가라앉아있던 내 마음을 조용히 건져 토닥토닥 쓸어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게 잘린 카스텔라 한 조각을 조심스레 만지작거리다 입에 넣었다. 포슬포슬한 식감이 입 안 가득 퍼지며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내일은 엄마가 같이 카스텔라를 먹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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