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티 블루스

진하고 부드러운 밀크티

by 녕인

유독 느리게 흘러가는 날이 있습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날

시계의 초침조차 멈춰버린 것 같은 날에는

저는 가만히 서서 우유를 끓이곤 합니다.


밀크티를 만들 때면 저는 느긋한 사람이 됩니다.

마음이 텅 빈 것 같을 때 냄비에 우유를 붓고 끓이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내면이 든든히 채워지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거품이 파글파글 소리를 내며 올라옵니다.

은빛 거름망이 반짝이며 우유 속으로 들어갑니다.

미지근한 속도로 넘실대던 우유는 내내 하얗기만 하다가, 홍차잎을 삼키자 옅은 산호빛을 띠기 시작합니다.


무엇이든 잘 삭혀내는 우유의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이 부럽고, 부드럽게 회전하며 또 다른 빛깔이 되어도 여전히 고고한 모습이 부럽습니다.

Would you hold my hand

If I saw you in heaven

Would you help me stand

If I saw you in heaven

# Eric Clapton_Tears In Heaven


느릿한 블루스가 방안을 적십니다.

밀크티의 향기와 섞여, 공기 중을 조용히 유영합니다.

블루스를 들을 때면 왠지 눈을 감고 싶어 집니다.

아직 우유는 깊게 끓고 있지만, 잠시 눈을 감아봅니다.


시야에서 배경이 사라지자

좀 더 선명해진 기타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좁은 무대 위에서 추는 블루스처럼

위태롭고 낭만적인 향내가 입술에 닿습니다.


꽃 그림이 잔잔히 수놓아진 찻잔에 밀크티를 따릅니다.

쪼르륵-소리와 함께 옅은 곡선을 그리며 떨어집니다.


느리게만 가던 시간이 제자리를 찾습니다.

어느덧 두 번째 곡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나이에 맞지 않게 조용하고 느릿한 블루스 계열 음악을 가장 좋아합니다. 빠르고 가파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에요. 밀크티도 마찬가지입니다. 홍차의 깊고 씁쓸한 맛을 우유가 부드럽게 감싸주며 진하게 뱃속을 채워주지요. 그 점이 블루스와 무척 닮았다고 생각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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