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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살수프 이야기

마음을 덥혀주는 위로의 음식

by 녕인 Jan 09. 2025

바다 향기 그득한 게살수프를 한 숟갈 떠먹을 때면, 나는 항상 겨울날의 한 장면이 머릿속에 몽글몽글 떠오르곤 한다. 유난히 몰아치던 칼바람에 코끝이 시리던 날, 어느 작은 카페 창가 자리에서 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게살수프 한 그릇을 마주했던 기억 말이다.


어릴 적 나는 게살수프를 좋아하지 않았다. 가족들과 특별한 날 고급 중국집을 갈 때면 가장 먼저 애피타이저로 게살수프가 나오곤 했는데, 특유의 비릿한 바닷물 냄새가 너무 싫었던 나는 늘 조금도 먹지 않고 저 멀리 밀어두곤 했다.


나중에 해산물을 좋아하게 된 뒤로도, 낯선 음식에 대한 도전이 실패로 이어질까 두려웠던 나는 수프를 골라야 하는 순간이 올 때마다 항상 익숙한 양송이 수프를 고르곤 했다. 가끔 단것이 먹고 싶은 날엔 달달한 콘수프를 골랐다.




그러던 내가 처음으로 게살수프를 먹었던 날은 평소와 많은 것이 다른 날이었다.

유난히 마음이 불안정하고 추웠던 날이었다. 나는 몰려드는 감정을 떨치고 싶어 혼자 무작정 기차에 올라탔다. 나는 부산에 도착했고, 생각을 비우고자 어느 전시회에 들어가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이미 끼니도 두 차례나 걸렀지만, 아무런 의욕도 입맛도 없었던 터라 나는 맛집을 열심히 검색하는 대신 발 닿는 대로 걸어 마침 눈에 띄는 카페에 들어갔다.


딸랑-

바닷가의 낯선 카페는 의외로 음료보다 음식이 메인인 곳이었다.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던 터라 가게는 텅 비어있었고, 유난히 조용하고 한적했다. 손님이 나뿐이었으므로 나는 괜스레 쭈뼛거리며 입구에 들어섰다. 주인은 가게 한 귀퉁이에서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감자를 깎고 있었다.


메뉴판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알리오올리오 파스타, 해물 리조또, 신선한 게살수프... 그날따라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게살수프가 유난히 시선을 잡아끌었다. 귀여운 꽃게 그림이 분필로 아무렇게나 슥슥 그려진 오래된 메뉴판. 바닷가 도시에 왔으니 음식도 해산물이 들어간 걸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살수프 하나랑... 보리차 한 잔 주세요."


가게 주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자리에 털썩 앉았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곧이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리차가 깨끗한 유리잔에 담겨 나왔다.

호록- 마실 때마다 얼어있던 손 끝과 목구멍에 따스하고 구수한 기운이 차올랐다.

머리 위로 느리게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저 멀리 바다 위로 일렁이는 노을을 한참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따뜻한 담요를 덮은 것처럼 마음이 고요하고 차분해졌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맛본 게살수프는 참으로 묘한 음식이었다.

바다의 깊은 풍미를 담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는 신기하게도 비릿하지 않은 포근함이 깃들어 있었다. 한 숟갈 떠먹을 때마다 혀끝에 퍼지는 게살의 감칠맛과 부드러운 크림의 조화가 감미롭게 느껴졌다.


낯선 타지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외로움이 조금은 잦아드는 것 같았다. 온종일 나를 옥죄던 불안감과 초조함도 게살과 함께 스르르 풀려갔다.


한 숟갈, 두 숟갈 떠먹을 때마다 부담 없이 뱃속에 내려앉는 게살 조각들.


그날 내가 먹은 게살수프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어디론가 휙 떠나고 싶던 울적한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주는 한 줌의 온기 같았다고나 할까.




게살수프는 조리하는 과정에도 결 따라 정성이 배어 있는 음식이다. 신선한 게살을 손수 발라내어, 부드러운 식감을 위해 밀가루와 버터를 천천히 볶아 루(Roux)를 만들고, 그 모든 재료를 하나로 끌어안는 크림을 부어 약한 불로 오래오래 끓여줘야 한다.


게살수프는 모든 게 빨리 스쳐가는 세상 속에서, 느릿느릿 여유롭게 정성을 들여야 비로소 완성되는 음식인 것이다. 그 시간과 손 맛, 마음을 하나로 꾹꾹 뭉쳐 마침내 누군가에게 따뜻한 시간을 선물하는 매개체가 된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마음이 붕 뜨고 불안해지는 날엔 집에서 게살 대신 게맛살을 찢어 게살수프를 만든다.

순간의 감정에 내가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지 않도록, 지금 이곳에서 꾹꾹 견뎌내어 또 하루를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잘 달래어 토닥여준다.


삶이 아무리 분주하고 차가워도,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된다. 그리고 게살수프는 늘 나에게 그런 존재로 남아 있다. 첫 숟갈을 입에 넣었을 때, 그 울 것만 같았던 위로를 다시 느낄 수만 있다면.


어느 날 문득, 당신도 차가운 날씨 속에서 따뜻한 게살수프 한 그릇을 마주하게 된다면 잠시 시간을 멈추고 그 온기를 느껴보길 바란다. 그 순간이 비록 짧더라도, 세상의 어떤 고단함도 녹여낼 수 있는 힘을 담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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