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기 다른 색과 맛을 지닌 젤리빈처럼
책상 한 켠에 무심히 놓여있는 유리병.
그 속에는 형형색색의 젤리빈이 가득 들어있다.
꾹꾹 씹어보면 사탕과 젤리의 중간쯤 되는 독특한 식감이 느껴진다. 입에 넣을 때만 해도 분명 단단했는데, 금세 입 안에서 쩍쩍 늘어나며 달달한 설탕 졸임이 된다.
젤리빈은 사탕일까, 젤리일까?
궁금한 마음에 찾아보니 젤리빈은 이름과 다르게 젤리가 아닌 사탕류로 분류된다고 한다.
젤리빈 유리병을 눈앞에 내밀면, 제 아무리 복잡하고 엄격한 사람이더라도 쉽게 거절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무슨 맛을 고를지 심각하게 고민하지도 않고 쓱- 손을 내밀어 홀린 듯 집어버릴지도 모른다.
수 십 개의 달콤하고 알록달록한 강낭콩들의 천진함 때문일까? 다른 간식들과 달리, 젤리빈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눈이 핑글핑글 돌고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나가버리게 되는 것이다.
손길 닿는 대로 한 알을 집어 입에 넣으면, 조그만 콩 모양 사탕 하나가 혀를 타고 목구멍을 지나 뱃속 어딘가에 쏘옥- 자리 잡아 금세 달콤하게 마음을 물들인다.
단순한 설탕 덩어리라고 치부하기엔 젤리빈은 너무나도 감성적이다. 그것은 마치 강낭콩처럼 마음속에 뿌리를 내려, 어릴 적의 추억, 잊고 지냈던 감정, 그리고 순간의 행복까지 불러내어 몽글몽글 떠오르게 한다.
나의 첫 젤리빈은 아주 특별하게 찾아왔다.
지금이야 휴게소나 편의점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간식이지만, 내가 초등학생일 때만 해도 국내에서 젤리빈을 찾기란 힘들었다. 당연히 나는 그것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으며, 그저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500원짜리 오렌지맛 슬러시가 세상에서 제일 맛난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나는 슬러시를 한 손에 들고, 물기로 젖어버린 종이컵 때문에 손을 잔뜩 적신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왔니? 이것 좀 봐. 영국에서 이모가 너희들 먹으라고 간식을 보내왔네. 한번 뜯어볼까?"
아주 어릴 적이라 기억이 희미해질 법도 한데, 나는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심장이 콩콩 뛰는 것을 느낀다.
처음으로 받아본 해외 소포. 마치 산타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은 듯 떨리고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두 살 터울의 동생과 하나,둘,셋- 힘껏 포장지를 뜯었다.
"와아..."
그곳에는 눈이 부시도록 선명한 색깔의 젤리빈이 커다란 포장에 가득 담겨있었다.
수십, 아니 수백 개는 될 법한 영롱한 젤리빈의 모습에 나와 동생은 한참을 만지작대며 멍하니 구경하기만 했다.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화려한 글씨, 단촐하지만 파격적인 색상의 젤리빈들이 포장지안에서 데굴데굴 조약돌처럼 굴러다녔다.
어머니께서 포장지를 사각사각 잘라내어 그릇에 젤리빈을 담아주시는 동안, 나와 동생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마침내 눈앞에 놓인 작고 예쁜 외국 사탕.
그때 내가 처음으로 집어든 젤리빈이 무슨 맛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젤리빈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떨림과 콩콩 뛰는 심장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젤리빈을 톡-깨물 때마다 생각이 나곤 했다.
요즘의 나는 젤리빈을 먹을 때 무슨 맛인지보다 어떤 색이 나올지, 누구와 나눌지에 더 설렌다. 혼자 야금야금 맛보는 것보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나눠먹으며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어쩌다 등장한 예상치 못한 맛에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며, 그 모습에 서로 깔깔 웃기도 하면서 행복하게 먹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인생도 마냥 달콤하기만 한 것이 아니듯, 젤리빈도 때론 뜻밖의 알 수 없는 맛을 선사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 맛의 조화가 우리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닐까. 때론 너무 달아서 물이 필요하고, 때론 너무 셔서 얼굴을 찡그리지만, 그런 순간마저도 젤리빈을 먹는 이유가 된다.
젤리빈을 바라보고 있으면, 무수히 많은 색과 모양이 마치 사람들의 마음 같다는 생각을 한다. 겉모습은 비슷해 보여도, 안에 담긴 맛과 향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솜사탕맛처럼 부드럽고, 누군가는 레몬맛처럼 상큼하다. 가끔은 뱉고 싶을 만큼 취향이 아닌 맛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젤리빈은 사람을 닮았다. 우리는 서로 다른 색깔과 맛을 지녔지만, 그 다양성이 모여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듯이.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각기 다른 색과 맛을 지닌 젤리빈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혹은 일상 속에서 조용하고 잔잔한 물결처럼 영향을 주고 받으니까 말이다.
삶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면 나는 젤리빈을 한 움큼 집어 입에 넣는다.
달콤함과 상큼함이 뒤섞여 입안에서 톡톡 작은 축제가 벌어진다. 복잡한 생각들은 잠시 내려놓고, 그 순간의 맛에만 집중한다. 그 짧은 찰나의 행복이, 하루를 견디게 하고 다시 내일을 기대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