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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의 화이트와인

와인에 담긴 시간과 향기

by 녕인 Jan 12. 2025
"어떤 술을 가장 좋아하시나요?"

어떤 색깔,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를 묻는 것은 다소 형식적이고 온도가 없는 수수한 질문이다. 딱히 그 질문에 답한다고 해서 나의 사생활을 들킬 염려도 없고, 물어본 사람 또한 아무 의미 없이 한 질문임을 알기에 그저 가볍게 톡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상 아무거나 말해도 괜찮은 느낌.


하지만 어떤 주종을 즐겨 마시는지에 답해야 할 때에는 다소 조심스럽고 머뭇거리게 된다.

누군가에게 내가 어떤 술을 좋아하는지 자세히 털어놓게 되면, 그 순간부터 나의 이미지, 대략적인 주량, 심지어 내면의 섬세한 취향까지 낱낱이 엿보이고 박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발가벗겨지고 재단되는 기분이 늘 싫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늘 대중적인 취향에 편승하여 간편하게 대답하고는 했다. 응, 나도 그거 좋아해. 자주 마셔.

어두컴컴한 저녁시간, 가끔 친구들과 약속이 생기면 어김없이 술자리가 만들어지곤 했다. 노곤한 몸을 이끌고 더벅더벅 추위 속을 헤치고 나와, 밝고 화기애애한 약속장소에 들어서면 다들 저마다 어떤 종류의 술을 마실지에 대해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나는 맥주!"


"나는 맥주는 배불러서 싫더라. 소주 마실래."


나는 사실 알코올 특유의 코를 톡 쏘는 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체질도 안 받는 편이지만, 이렇게 별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올 때면 그때의 상황과 사람에 맞춰 정해지는 주종 속에 나를 욱여넣곤 했다.


마치 혓바닥을 찌르는 듯한 맛과 향을 느끼며, 가파른 술이 찰랑찰랑 차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집이 그리워졌다. 분명 고독 속에 있을 때는 사무칠듯한 추위에 질려 사람을 찾았었는데, 막상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가는 순간 숨 막힐듯한 열기에 진이 빠져 간절하게 혼자가 되고 싶어지는 모순이 나조차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화이트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남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나에게 있어 와인이 가장 맛있는 때란, 남들과 함께하는 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뜻한 방, 가장 좋아하는 의자에 편하게 기대앉아 아끼는 책을 팔랑팔랑 넘기며 와인을 홀짝이는 바로 그 순간.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은은한 화이트와인의 색깔, 입안에서 헤엄치는 달큰한 향기, 체내에 천천히 퍼지는 알코올을 부드럽고 섬세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투명한 잔 위로 가득 찬 투명한 빛.

마치 유리창이 햇살을 가두듯, 화이트와인의 잔잔한 색은 마음 한구석까지 그늘지지 않게 비춰준다. 화이트와인은 소리 없는 봄바람 같기도 하고, 어느 한적한 도시의 분수대 같기도 하다. 가볍게 다가와 머물고, 서늘한 듯 따뜻하게 스며든다. 그 조용함 속에서 나는 늘 내가 놓쳤던 감정들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는 말한다. 와인은 순간을 특별하게 만든다고.

아니, 화이트와인은 오히려 평범한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한다.

바스락거리며 넘어가는 책장 소리, 창문을 두드리며 또르륵 떨어지는 빗방울, 그리고 은은하게 벽지를 비추고 있는 낡은 상아색 조명. 그 모든 것이 와인과 함께 꼴깍꼴깍 넘어가며 하나의 장면으로 기억 속에 스며든다.

바쁘게 돌아가는 하루의 끝자락, 잔을 기울이며 그 속을 천천히 들여다본다. 눈부신 여름날의 노을처럼 따뜻하고, 가을밤 서늘한 바람처럼 시리도록 맑다.

오늘의 나에게 따뜻한 마음을 건네듯 화이트와인을 따라본다. 흰 빛의 잔 속에 작은 위로와 담담한 용기를 담아,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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