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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욕 좀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정신과 상담 여섯 번째 기록(2025.3.27. 목.)

by 방구석도인

"해외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어요. 해외에 나갈 방안을 생각해 봤고, 가장 큰 문제가 영어인지라 영어 공부도 시작했어요. 이제 정년퇴직이니 임용이니 하는 것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어요."

저의 말에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대한민국 곧 망할 것 같은데, 잘 생각했다고요. 차라리 그게 더 나을 수도 있다고요.


농담 반, 진담 반이겠지만 의사 선생님의 반응에 안심이 되었습니다. 조증의 증상이라거나 허황된 생각이라고 바라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제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시고는 다행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번에 여행 다녀온 직후에 저를 봤을 때는 정말 많이 들뜬상태였다고 하네요. 가라앉지 않고 계속 뜰까 봐 걱정하셨다고 합니다. 오늘 저의 모습은 여러 가지로 안정돼 보였나 봐요. 그래서인지 의사 선생님은 제게 선물을 하나 안겨 주셨습니다. 제가 간절히 바라던, 식욕억제 효과가 있는 약을 드디어 처방해 주셨어요.


"1월에 약물 조절한 이후로 식욕이 올라서 찐 살이 빠지지 않았어요. 이후로도 계속 술과 음식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요. 주로 스트레스받을 때면 음식 생각이 나는데, 저는 술에 취하면 음식을 많이 먹어요. 며칠 전에도 과자 폭식을 했어요."

지금 가장 큰 문제가 식욕이냐고 물으시길래 그렇다고 했습니다. 차라리 식욕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남들은 식욕이 너무 없어도 힘들다던데 저는 식욕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약을 조절하시겠다고 하셨어요.


"저 여름에 위고비 맞을 계획인데, 약물과 병행해도 괜찮은가요?"

의사 선생님은 이 약을 먹으면 위고비가 필요 없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네? 그 정도로 효과가 좋다고요?) 저는 순간 기분이 째졌습니다. 제발 위고비가 필요 없어져서 돈 굳는 일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약이라는 게 워낙 개인차가 있다 보니 효과가 어느 정도일지는 예측하기 힘듭니다.


처방전을 받고 보니 기존의 리튬은 그대로 한 알이었고요, 아빌리파이가 빠지고 대신 젤독스가 들어왔습니다. 아빌리파이는 환우들 사이에 악명 높은 약입니다. 돼빌리파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지요. 아빌리파이는 공식적으로 살찌는 약은 아닙니다. 의사들도 이 약은 살이 찌지 않는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실제 복용한 환우들은 체중이 수십 킬로 증가했다고 주장합니다. 사람에 따라 안 찌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체중 증가에 대한 고통을 호소합니다.


젤독스를 처방받고 나니 처음에는 의사 선생님에 대한 화가 일어났습니다. 진작에 살 빠지는 효과가 있는 약을 처방해 줄 것이지, 왜 살이 찐 지금에서야 처방해 주었을까요! 하지만 젤독스에 대해 조금 알아보고 나서 오해가 풀렸습니다. 심전도에 이상이 올 수 있는 약이라네요. 가장 안전하고 많이 쓰이는 약을 1차로 처방한 후, 그 약이 맞지 않을 때 다른 대체 약을 처방해 주는 방식인 듯합니다.


젤독스는 조현병과 조울증 치료에 쓰이는 약인데 부작용으로 체중 감소 및 식욕 감소가 있나 봅니다. 검색해 보니 젤독스를 복용하고 살이 너무 빠져 고민이라는 글도 있더라고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입니다. 혼자 꾸역꾸역 빵과 과자를 먹어대며 부른 배를 안고 잠이 드는 비참한 저의 모습을 이제 더 이상은 안 봐도 될까요? 화요일에는 대학원 다녀오는 차 안에서 운전하며 샌드위치와 빵 두 개를 먹었습니다. 그렇게 돼지처럼 먹은 날에는 제 자신이 많이 미워집니다. 많이 먹는 저를, 살찐 저를, 미워하고 혐오하고 증오하며 사는 날들에 그만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요?


항우울제는 처방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또 경조증으로 확 뜰까 봐 걱정되시나 봐요.


살만 빠질 수 있다면 항우울제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살 빠지면, 예쁜 옷 입고 예쁜 카페에 앉아 우아하게 커피를 마실 거예요. 7월에 여행 가서 섹시한 사진도 많이 찍을 거고요. 우울할 틈이 있을까요?


젤독스의 효과를 기대해 보며, 이번 달도 열심히 약물 치료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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