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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울제가 필요해.

스트레스가 나를 살찌게 한다.

by 방구석도인

경조증이 왔다는 이유로 제가 먹던 약물 중에서 항우울제가 빠진 지 한 달하고 열흘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 체중이 4kg이 증가했어요. 약물 복용을 시작한 이후로 술이나 음식에 대한 갈망이 많이 줄어들어 저도 모르는 사이 3kg가량이 빠져서 기분이 좋았었거든요. 그런데 항우울제가 빠지자마자 바로 식탐이 올라왔습니다.


사실 전 이게 항우울제가 빠진 탓이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의사 선생님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리튬 용량이 늘어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사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리튬 용량만 낮춰 주셨어요. 리튬 용량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술과 음식에 대한 갈망이 계속 올라왔습니다. 물론 술을 거의 매일 마시다시피 한 과거에 비하면 횟수는 많이 줄었지만, 최근 맥주를 몇 번 마셨습니다. 저는 술을 마시면 항상 폭식이 뒤따라요. 단순한 과식 정도가 아니라, 육안으로 보기에도 배가 부풀어 오를 만큼 과도하게 먹습니다. 비정상적인 식욕이지요.


제가 조울증인 것을 알기 전에는 단순히 먹성이 좋은 건 줄로만 알았어요. 우리 식구들 전부 먹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하지만 이번에 항우울제를 끊으며 확실히 알았습니다. 저의 비정상적 식욕은 우울감과 스트레스에서 기인한다는 것을요. 사실 저는 제가 스트레스받고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제가 늘 먹을 것을 생각하고 자꾸 먹으려 하는 행동이 알려주고 있는 거였어요.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으면서 스트레스받고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겁니다. 스마트워치로 수면 패턴을 체크하는데 술 마시고 잔 날은 모두 최고의 수면 점수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잘 먹고 잘 자니 저는 제가 스트레스나 우울감이 없는 줄 알고 살았지요. 이렇게 제 몸을 갉아먹으며 온몸으로 스트레스를 받아내고 있는 줄도 모른 채요.


어제도 술을 마시고 폭식을 했습니다. 60계 치킨 양념 순살 반 마리와 생맥주 1000cc, 제가 좋아하는 오리오의 과자 "Na 치즈크림 샌드"를 한 여섯 상자 먹은 것 같습니다. 술을 먹기 전에 이미 과일로 배가 잔뜩 불러있는 상태였고요. 과일만 먹고 잠들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술 마시고 싶다는 충동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사실 어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이었어요. 우울감도 올라왔고요. 과거에는 자각하지 못했던 것을 자각하는 계기였습니다. 저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무식해서 먹을 것만 밝히는 사람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를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이 고장 나 있는 상태입니다.


스트레스받으면 누구나 술 한잔에 매콤한 떡볶이가 생각나겠죠. 하지만 저는 조절 능력을 상실한 상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는 항우울제 없이는 술과 음식을 제 능력으로 조절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술도, 음식도 끝까지 밀어 넣거든요. 취할 때까지 마시고도 취한 상태로 계속 마십니다, 쓰러져 잠들 때까지요. 음식도 위에 가득 차서 더 이상 먼지 하나 삼킬 수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치닫습니다. 저는 항우울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제가 조증 상태가 될까 봐 항우울제를 뺐지만, 내향인인 제게는 오히려 살짝 조증인 상태가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며칠 뒤면 병원 상담이 있는 날인데 다시 항우울제를 처방받아야겠습니다.


전에 먹다 남은 약이 있어 어젯밤에 제가 임의로 항우울제를 먹었습니다. 플라세보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기분 좋은 상태로 기상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어제의 기분 나빴던 일을 곱씹으며 일기장에 욕을 썼을 텐데, 웬일인지 어제의 나쁜 일은 크게 생각나지 않으며 생각나더라도 그다지 분노가 치밀지 않습니다. 가슴 두근거리며 부정적 의미로 흥분되는 스트레스 상태도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웃긴 일을 생각하며 웃음이 났습니다.


음식은 감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말은 많이 들어 보았지만 이렇게 저의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며 통찰한 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과거의 저는 이 말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우울해서 먹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받아서 먹는 게 아니라 음식이 맛있어서 먹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 말을 싫어했습니다. 지금 와 돌이켜 보니 꾸역꾸역 먹던 과거의 제가 너무나 안쓰럽습니다. 마음이 아픈 줄도 모르고 마음을 돌보지 못한 채, 음식을 먹어 몸을 괴롭혔어요. 그러고 나서는 살쪘다고 또 자신을 학대하고 괴롭혔지요.


항우울제 한 알이, 이런 저의 구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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