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쓰레기처럼 살고 싶다.
써머스비 맥주의 애플맛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상큼한 노랑 캔에 담긴 망고앤라임 맛을 편의점에서 발견하고는 궁금증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맥주는 왠지 네 캔을 사지 않으면 손해인 것 같아서 네 캔을 사고, 내가 애정하는 짭짤한 스낵 세 봉을 함께 샀다. 며칠 전부터 갑자기 만보 걷기를 하겠다며 (이제 겨우 세 번 했다.) 트랙을 뱅글뱅글 돌았더니 근래에 몸이 무척이나 허기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장고 안의 써머스비가 보내는 유혹을 근 일주일은 무사히 이겨 내었으나, 어제는 기어코 써머스비에게 나의 몸을 내어 주고야 말았다.
처음에는 딱 한 캔만 마실 생각이었다. 한 모금 마셔보니 웬걸? 예상보다 더 맛있었다. 너무 달지 않게 라임맛이 감싸주니 마치 망고에이드를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간단하게 육포와 마셨으나 그다음엔 스윙칩 디핑소스맛, 명불허전 허니버터칩이 이어졌다. 술 마실 때 빠지면 서운한 컵라면마저 먹고 나니 배는 가득 차 바늘 하나 꽂을 틈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운동하면 배고프고, 배고파서 먹으면 배부르고, 배부르면 졸리는 무한루프에 빠진 채 잠이 들어 버렸다.
영어공부 해야 한다는 강박,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 운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 특수교사로서 세상이 기대하는 이미지에 대한 강박,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는 강박 등 하다못해 깨달아야(?)한다는 강박까지, 나는 수많은 강박에 억압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대단히 반듯하고 위대하고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원래 강박이라는 건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만 문제다.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만, 정작 몸으로 실천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긴장감과 실망감, 허무함, 좌절감, 죄책감, 수치심. 생각과 삶이 다를 때 사람은 괴롭고 불행하다.
저 수많은 강박들은 세상과 타인이 내게 지운 것인가, 아니면 내가 내게 씌운 굴레인 것인가. 이제는 원인조차 알지 못한 채 수많은 강박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숨이 막힌다. 운동 하루 안 했다고, 과식 하루 했다고 이토록 죄책감 들건 또 뭐람. 요새 책을 많이 읽지 못한 것이 이토록 죄책감 들 일인가? 가끔은 나도 쓰레기처럼 살고 싶다. 가끔은 나도 타인의 기분과 안위보다는 나의 기분과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 싶다. 가끔은 나도 공부나 독서 따위 시원하게 발로 걷어차 버리고 낮잠이나 자고 싶다. 조울증 약을 복용 중이지만, 가끔은 나도 맥주가 마시고 싶다.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
영어 공부 한다는 핑계로 보고 있는 캐나다 시트콤 <김씨네 편의점>을 보며, 과자와 함께 먹는 써머스비 망고앤라임은 속이 시원하고 후련한 맛이었다. 과식 뒤에 자는 잠은 달콤했다. 하지만 퇴근 후의 시간을 매일 이렇게 보낼 수만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가끔 쓰레기처럼 살고 싶은 것이지, 평생을 쓰레기처럼 살고 싶은 것은 아니니까. 나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는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원하는 삶이 무엇이냐고. 자꾸 묻는 이유는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마흔 하고도 네 살이지만 나는 여전히 모른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여전히 되어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 그렇기에 내가 원하는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 무엇을 하든, 하고 싶은 것을 한다면 나중에 후회할 일은 없을 거라고 믿는다. 결과가 어떠하든 좋아서 한 일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쓰레기같이 보낸 어제저녁 시간에 대해서도 변명의 여지는 없다. 맥주와 과자와 컵라면이 좋아서 먹었다. 가금은 하등 도움되지 않는 쓰레기 같은 시간들이 좋다. 그 시간만큼은 강박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