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증의 터널을 지나는 중입니다.
국어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이십 대 시절, 문학 자습서의 귀퉁이에 실린 전혜린의 글을 읽고 첫눈에 반해 전혜린의 수필집을 사서 읽고 또 읽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서른한 살의 이른 나이에 자살을 해서 그녀가 남긴 글이 많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글에서 만난 안개 자욱한 독일의 슈바빙과 함께 그녀의 존재감은 강렬했습니다. 당시 전혜린을 동경한 나머지 자살한 소녀들도 있다고 하나, 차마 그것만은 따라 하지 못하겠어서 검은 머플러를 두른 채 커피만 연신 마셨습니다. 얼마 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혜린도 혹시 조울증은 아니었을까? 그녀는 잘 먹지도 않고, 잠도 잘 안 자고, 학문에만 몰입했습니다. 그러면서 술과 담배, 커피, 수면제에 의존적이었죠. 극심한 우울감과 허무감을 호소했으며, 결국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생에 대한 열정이 넘칠 때에는 세상 그 누구보다 정열적이고 치열했지만, 우울할 때는 끝없이 나락으로 가라앉은 감정을 호소했어요. 조울증의 전형적인 모습이지요.
저는 지금 울증에 접어들었습니다. 조증 상태일 때의 제 모습이 꿈만 같습니다. 조증일 때는, 하고 싶은 게 참 많습니다. 비록 실현은 다 못하더라도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하고 싶은 것들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위시리스트 목록이 늘어 가지요. 가보고 싶은 카페도 예약하고, 영어 공부 한다며 캐나다 드라마도 몇 편씩 보고, 영어책도 좀 보고, 운동한다며 만보 걷기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차도 마시고, 밀크티도 만들어 먹고, 맥주도 마시던 제가 지금은 아무것도 하기가 싫습니다.
퇴근 후 거의 침상에 누워 지냈습니다. 간신히 씻고, 출퇴근하고, 꼭 필요한 집안일을 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책도 읽기 싫고, 영어도 꼴 보기 싫습니다. 글 쓰기도 싫고요. 오늘 노트북을 펴기까지 일주일을 망설였습니다. 운동도 당연히 안 합니다. 먹고 싶은 것도 딱히 없고, 음식을 먹어도 전처럼 맛있지가 않습니다. 그냥 누워 있고만 싶습니다. 무언가를 할 에너지도, 동기도, 욕구도 없습니다.
조증일 때는 집에서도 사부작사부작 끊임없이 바빴는데 말이죠. 조증일 때는 가슴깊이 행복감과 충만함이 차올랐습니다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특별하고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집안의 사물 하나하나가, 자연의 풀 한 포기가 너무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살아있는 게 행복했습니다. 앞으로 잘 될 것만 같았습니다. 좋은 사람들만 만나게 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너무 못나고 부족하게만 느껴집니다. 미래가 암담하고 암울하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게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외롭고 혼자인 것만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옆에 있어서 서로 꼭 끌어안고 낮잠이나 잤으면 좋겠는데, 저는 혼자입니다. 아무도 저를 사랑해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도 공허하고 우울한 감정을 털어놓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어릴 때는, 저의 우울함을 함부로 토해냄으로써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이것은 오로지 혼자 감당해야 하는 감정이라는 것을요. 함부로 타인에게 이 짐을 전가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요. 나의 우울과 어둠을 밝고 화사하게 화장을 한 후,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는 것을요.
임용고시를 완전히 포기하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과 돈을 날렸지만요. 저는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조증일 때는 너무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튀기에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콘서타를 먹어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울증일 때는 공부할 에너지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기가 싫습니다. 수험생활은 기복 없이 꾸준히 해야 하는데, 저는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임용고시에 도전해 보고 싶어 하고, 강의를 결제하고, 의욕에 불타오르던 것 또한 조증 증상의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들 불꽃입니다. 저는 그게 조증인 줄 꿈에도 모르고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도전하고 실패하기를 반복해 왔습니다.
그나마 감사하게 생각하는 건 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상생활과 직장생활을 평온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과 직장이라는 끈을 놓아버린다면 저는 정말 나락으로 떨어질 것을 알기에 간신히 붙잡고 있는 동아줄입니다. 제 능력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이 이상의 일들은 제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중입니다. 조증 때에는 자꾸 제 능력 밖의 일들을 벌이려고 하지요. 조증일 때의 나와 울증일 때 나의 격차로 인해 그동안 제가 괴로웠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조증일 때의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나는, 진짜 내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저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자 합니다.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되고, 그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고, 살을 빼지 않아도 되고, 영어도 못해도 된다고. 임용고시 합격 못해도 되고, 운동도 안 해도 된다고. 미국 까짓 거 안 가도 그만이라고. 친구도 애인도 없어도 된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대신, 살아만 있자고. 살기 위해서 돈은 필요하니 직장은 잘 다니자고.
이거면 됐다고. 잘하고 있다고. 충분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