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나'를 찾아서(7)

선택과 책임

by 든든

대학교 교양 수업을 들을 때였다.

교수님께서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선택과 책임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교수님은 성인이 되어서 부모님을 참 많이 원망했다고 하셨다.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이 아니라 부모님이 선택한 길을 살아왔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셨다고 한다.

원망을 하던 어느 날 문뜩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왜 나는 부모님을 원망만 하고 있을까?'

'부모님이 가라고 했지만 그걸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은 나의 책임이 아닐까?'

그 이후 교수님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삶의 길을 선택하는 주도적인 삶을 사셨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당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현재까지도 나는 선택을 할 때마다 이 이야기를 떠올리곤 한다.

나는 어렸을 때 꿈이 참 많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나의 꿈은 축구선수였다. 축구 선수를 하고 싶어서 축구 연습도 많이 했다. 한 번은 옆 학교 축구 코치가 나에게 와서 명함을 준 적이 있었다. 나는 신이 나서 부모님께 명함을 가져다 드렸다. 그런데 부모님은 축구 선수가 되는 걸 말리셨다. 그냥 말리신 게 아니었다. 내가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온 친척들이 알게 되었다. 우연히 가족 식사를 가게 된 날 어른들은 나에게 축구 선수가 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나의 꿈을 막았다. 물론 어른들이기에 나의 미래에 대해서 더 현실적으로 보셨을지는 모르겠다.

나에게 그날을 기억이 왜 슬펐냐고 물어본다면 어른들이 단순히 내 꿈을 막아서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에게 있어서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내 꿈이 짓밟히는 게 큰 수치였다. 한 명이라도 내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었다면 좋았으면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가족들에게 더 이상 하고 싶은걸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나에게 두 번째 꿈인 엔지니어조차 부모님은 만류하셨다. 사실 엔지니어는 내가 생각해도 포기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꿈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때에도 부모님은 잘못된 방법을 선택하셨다고 생각한다. 직접적으로 나에게 이야기하는 게 힘드셨는지 친척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게 특징인 것 같다.

내가 마이스터고, 공고 등을 지원하려고 하자 이모와 친척형이 전화 와서 나를 말렸다. 경험해 보니 대학은 나와야 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눈물이 났다. 고마워서가 아니라 지긋지긋했다. 왜 이렇게 남의 삶에 관심이 많은지 내가 뭘 하려고만 하면 나를 말리는 것만 같았다. 정말 화가 났다.

그 이후에 내가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한 후 선언했다. 내가 뭘 한다고 해도 말리지 않을 것.

부모님은 내 이야기를 반영해 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이상한 건 교회도 다니시지 않는 부모님이 신학교 갈 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축구선수도 말리고, 아들이 돈 빨리 벌겠다는 기특한 소리를 해도 말리셨는데 신학교를 지원한다고 했을 때에는 아무 말도 안 하셨다. 참 특별한 집안이다.


어쨌든 대학교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진학을 했지만 나에게는 해결되지 않은 마음들이 있었다.

과거에 내가 하려고 했던 선택들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이 있었던 것이다.

교수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를 비추어 보았다.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부모님도 친척들도 전부다 나를 말렸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서 강하게 반박하지 않았다. 정확한 계획과 목표를 이야기하지 못했다.

나이가 어렸다는 것? 핑계이다.

어른들의 말에 어떻게 반박을 할 수 있냐고? 핑계이다.

물론 어른들이 나에게 어른답게 대해주셨는가? 나는 아닌 것 같다. 내 이야기를 어느 누구도 충분히 들어주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외부적인 요인들만 탓한다면 나는 자기 주도적인 삶을 평생 살 수 없다.

결심했다. 핑계 대지 않기로. 그리고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기로.


나는 그날 이후로 어떤 선택도 나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비록 남들을 위해 내가 희생하는 선택을 할 때에도 많았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랐던 건 내가 희생하는 선택을 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늘 누군가를 배려하고 상처받는 건 나였다.

사람들을 배려하는 건 나에게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할 때 상처를 받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왜 나는 상처를 받을까?' 고민했다.

사람들을 너무나 좋아하지만 늘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는 나에 대해서 스스로 분석해 보았다.

나는 남들을 위한 선택을 했다. 거기에는 책임이 포함되지 않았다.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책임.


내 인생은 이제 남들이 아닌 내 선택으로 이루어진 주도적인 삶이 되었다.

여전히 나는 이 공식을 사용한다.

선택을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고민한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그 원하는 것을 위해서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내가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하게 된다면, 어떤 책임을 질 것인가?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한다는 것이 나는 이기적인 것인 줄만 알았다.

다 함께 음식메뉴를 정할 때도 나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섣불리 말하지 않는다. 이기적인 것 같아서.

반면에 자신이 먹고 싶은걸 확실히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대게는 사람들이 크게 상관하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를 먼저 꺼낸 사람의 메뉴를 먹으러 가곤 한다.

나는 멀리서 가만히 지켜보면서 메뉴를 이야기한 사람이 이기적이라고 느꼈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은 음식메뉴를 정해서 자신의 욕구를 표현한 것뿐인데 이기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저 말했을 뿐. 나는 내 이야기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찌질이였다.


남을 배려하기 전 나 자신을 배려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스스로를 충분히 챙길 수 있을 때 진정으로 남을 배려할 수 있다.

나 스스로를 돌보는 과정은 단단해지는 훈련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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