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되물었다. 미련 곰탱이인 내가 꺼낼만한 단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못 본 척하고 말을 이었다.
“어, 최근에 생각이 좀 바뀌었어. 살다 보니까 여우짓이라는 게 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꼭 얌체같이 구는 것만 여우짓은 아니잖아. 요령 있게 살자는 거지, 요령.”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라는 사람의 변화에 적응하는 중인 건지, 자신이 ‘여우짓’을 해야 하는건가 고민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건 확실했다. 그녀의 젓가락이 의미없이 앞에 놓인 접시 안을 더듬거렸다.
“여우짓이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거예요?”
이윽고 생각을 마친 그녀가 물었다.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태도다. 잠시동안 혼자 야무지게 삼겹살을 먹고 있던 나는 젓가락을 내려놨다.
“내가 너네 남자친구 본 적은 없지만, 네 말 들어보니까 약간 강성인 거 같아.”
“좀 그런 편이에요.”
“근데 너도 생각보다 고집이 꽤 있잖아. 강성끼리 맞부딪치니까 자꾸 싸움이 나는 거지.”
“음······,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그녀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반쯤 동의했다.
“남자친구가 화낼 때 같이 화내지 말고 연기를 좀 해봐. 큰 소리를 내면 꺅하면서 무서워하는 척을 한다든지.”
“여태 더 크게 소리 질러 줬는데요.”
“울어버린다든지.”
“울라고요?”
그녀의 얼굴이 대번에 흐려졌다. 난 손사래를 쳤다.
“우리가 연기자도 아니고 진짜 울 수는 없겠지만, 척이라도 해 봐. 우는 척하다 보면 진짜 눈물이 나올 때도 있잖아. 안 나오면 남친 몰래 눈알을 찔러서라도 눈물을 쥐어짜!”
“잘못하면 실명이에요, 언니.”
“얼마나 콱 찌르려구? 손가락 끝으로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은 콸콸 나올걸.”
그녀는 웃었지만, 얼굴에 대놓고 쓰여있었다.
난 못 해.
그녀나 나나 여우보단 곰이었다. 눈에 빤히 보이는 약아빠진 짓은 영 재주가 없었다. 그러니 남자친구 앞에서 연기라니, 발연기로 흑역사나 쓰지 않으면 다행일 소리였다.
‘절대 못 해'라고 쓰여있는 그녀의 얼굴을 본 나는 차선책을 제시했다.
“내가 말하긴 했지만, 네가 그런 연기를 능숙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니야. 남자친구랑 맞서지 말고 대응을 살짝 바꿔보라고 말한 거야. 네 남친, 평생을 여자보단 남자가 많은 환경에서 보냈다며?”
“네. 운동도 오래 했고, 거의 남자들 사이에서 지낸 시간이 많았대요.”
“그런 환경이면 보통 얕잡아 보이면 안 된다, 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잖아. 남~자~! 이런 면도 있을 거 같은데.”
나는 가슴을 쭉 펴며 양팔을 좌우로 살짝 들어 보였다.
“그쵸, 약간 상남자라고 해야 하나? 언니 말대로 남~자~! 이런 것도 좀 있고.”
그녀가 내 말투를 흉내 내어 말했다.
“그럼 반대로 여자들한테는 좀 신사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갖고 있지 않을까? 화내면 같이 화내지 말고 풀 죽은 척을 한다든지, 약한 모습을 보인다든지 그러면 더는 화 안 낼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으음~, 여태 그런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화내지 않고 다른 대응을 한다는 건 좋은 생각 같아요. 막 울거나 그런 건 전혀 자신 없지만, 약간 상심한 것처럼 행동하는 정도라면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게 완전히 연기는 아닌 게 결혼이 막상 코앞으로 다가오니까 고민이 많거든요.”
“그래? 고민이 많아?”
“네, 아무래도.”
흔히 말하는 메리지 블루인가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나는 곧 반성했다.
물론 제일 큰 고민거리는 남자친구였지만, 그 외의 이야기는 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그녀는 꽤 많은 걸 고민하고 있었다. 계획적인 그녀는 결혼식 뿐만 아니라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이미 마일스톤을 세워두었다. 결혼 후 최대한 빨리 아이를 가지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고민은, 의외로 이 착실한 계획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임신이나 출산도 많이 두렵거든요. 적은 나이가 아닌만큼 최대한 빨리 아이 가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준비 중이긴 해요. 그런데 아직 제 마음은 백 퍼센트 준비된 건 아니라서요.”
“그렇구나.”
“이런 부분을 남자친구한테 말한 적은 없으니까, 솔직한 제 심정을 얘기해 볼까봐요.”
그녀는 웃으며 말을 맺었다.
“물론 그전에 한 번 열받음을 꾹 참고 감수해야 하는 게 아주 속이 터지겠지만, 괜찮은 방법 같아요. 한 번 해봐야겠다.”
우리는 맥주잔을 들어 맞부딪쳤다. 눈치 보지 않고 먹은 삼겹살과 치즈 폭탄 계란찜 한입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언니, 작전이 통했어요.”
반가운 소식을 들은 것은 며칠 뒤 걸려온 그녀의 통화에서였다.
“진짜? 통했어?”
“네, 고민거리 얘기하다 보니까 저도 감정이 복받쳐서 진짜 울먹울먹 한 거예요. 그랬더니 남친도 당황한 거죠. 그렇게 힘든 줄 몰랐다고, 앞으로 자기가 잘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오, 그래? 그럼 그 뒤로 안 싸웠어?”
“싸울 틈이 없었어요.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아무튼 잘 하겠다고 했으니까 믿어보려고요.”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올라간 것이 그녀의 기분을 짐작케 했다. 그 목소리로 그녀는 언니 말대로 해보길 잘했다고 해주었다.
사실 별로 한 일은 없었기에 칭찬이 쑥스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뿌듯하기도 했다. 내가 나이를 헛먹은 건 아니었나보다, 아끼는 동생한테 도움되는 말을 해줄 수 있어 다행이구나 싶었다.
남자친구와 화해도 했고, 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깨닫기도 한 것 같고.
앞으로 그녀가 화목한 가정을 이룰 일만 남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