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혜정은 숨을 내뱉었다. 하얀 입김이 공중에 흩어졌다.
경사진 언덕길을 빠르게 오른 탓이었다. 가쁜 숨에 가슴이 오르락내리락거렸다. 목적지는 아직 조금 더 걸어야 했다. 다행히 가장 경사가 높은 곳은 다 지났다.
"이렇게, 후, 경사가 높았었나?"
어릴 적 살던 동네에 가는 길목이었다. 혜정은 여전히 이 근방에 살고 있었지만 오래된 구축 건물이 늘어선 이 동네를 떠난 지는 좀 오래되었다.
"야! 늦었어!"
골목길을 돌자 친구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혜정은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5분 남아있었다. 소꿉친구들이 인사 대신 늘 하는 헛소리였다. 그녀도 평소처럼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안 늦었거든."
늘 늦는 인사는 따로 있었다. 역시나 약속시간 10분이 지나서야 영서가 도착했다.
"미안, 미안. 길이 막히더라고!"
"네가 밥 사라."
"미안하다니까~."
늘 하는 변명도 익숙했다. 혜정과 친구들은 발걸음을 옮겼다.
"여긴 초등학교 때랑 변한 게 없네."
"어! 저기 문구점 아직도 있어!"
"대박."
"야, 여기로 가면 지름길 아니었냐?"
"이제 니 몸뚱이로는 못 들어간다."
혜정, 영서, 서준, 지혁, 민후는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떠들어댔다. 모두 같은 초등학교, 같은 반에 함께 다니다가 졸업한 오랜 친구들이었다. 종종 보는 얼굴들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오늘은 조금 특별했다. 바로 묻어둔 타임캡슐을 10년 만에 여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너넨 뭐 묻었냐?"
"너부터 말해."
"내가 먼저 물었거든?"
"난 금덩어리 묻었다."
"미친 소리 하네."
그들은 낄낄대며 유치한 대화를 이어갔다. 대화는 초등학교 앞 놀이터에 가까이 다가갔을 무렵 민후의 한마디에 끊겼다.
"어?"
얼빠진 그 소리에 다들 놀이터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놀이터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야······. 모래 어디 갔냐·······?"
"······."
그들이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모래로 가득 차 있던 놀이터 바닥이 녹색 폐타이어 재질로 바뀌어 있었다. 타임캡슐은 다 함께 힘을 합쳐 모래를 아주 깊이 판 후에 묻어두었었다. 혜정 일행은 망연자실해서 놀이터를 쳐다본 채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때 혜정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냐! 화단 근처였어! 화단 근처 모래를 팠었어! 놀이터 한가운데가 아니라!"
"어, 맞아! 그래!"
서준이 맞장구를 쳤다. 다들 동의하며 한 마디씩 하더니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정확히 어디였지?"
"음, 근처에 빨간 꽃이 피어있었던 거 같은데."
"꽃 같은 건 바뀌었을걸? 엄청 큰 나무 근처로 골랐어."
"맞다, 맞다! 나무 바로 밑은 화단이라 흙이 너무 단단해서 놀이터 쪽으로 좀 이동해서 팠다!"
"어! 저건가?"
지혁의 손가락을 따라 모두의 시선이 옮겨갔다. 손가락이 가리킨 것은 놀이터 근처에서 가장 큰 나무였다. 모두 우르르르 몰려가서 나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근데 이건 단풍나무가 아닌데······."
식물을 잘 아는 영서가 말했다. 겨울이라 잎이 다 떨어지고 눈이 조금 쌓여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은 단풍나무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 그럼 우리가 골랐던 나무가 아닌 거야?"
"그런 것 같아."
"화단도 뭔가 달라."
그들은 주위의 나무를 다시 둘러보았다. 어딜 봐도 그들의 기억 속에서 처럼 굵은 나무는 없었다.
"아무래도 없어졌나 봐."
혜정이 중얼거렸다. 다들 기운 없이 바닥만 둘레둘레 살펴보았다.
그때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영원한 건~ 절대 없어~ 결국에 넌~ 변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