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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에 사는 가짜 회계사

쥐의 이야기

by 준비

쥐(子)

예로부터 쥐는 민첩하고 생존에 능한 동물로 여겨졌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상황 판단이 빠르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잔머리와 계산력으로 상징된다. 인간으로 치면 자신의 이익을 빠르게 계산하고,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 줄 아는 전략가 타입임과 동시에 그 교활함이 타인의 신뢰를 배신으로 바꾸기도 하며 간계를 부리기도 한다.





누구나 욕망이 있다.

검소함과 인색함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욕망도 인색함도 나를 향하지 않으면 상관없다.

그러나 결국 그런 인간들은,

자기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그 오물을 묻히게 된다.



<2011년 8월, 금요일 점심>

유독 땀을 많이 흘리는 나는 길에서 나눠준 학원 홍보용 부채를 쉼 없이 흔들며, 강남역으로 향했다.

당시 친한 동생의 소개로 알게 된 동갑내기 친구와 점심을 먹기로 했다.

명문대 경영학과를 졸업 후 회계사로 일하고 있던 친구인데, 나중에 밥 한 끼 먹자라는 말을 나에게 했던 터라 마침 서울에 올 일이 있어 연락해서 약속을 잡았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20대의 나는 밥 한 번 먹자라는 말이 진짜로 밥 먹자는 뜻으로 알고 있기도 했었다. 어찌 됐건 강남역 언덕 위에 있는 화덕 피자 가게를 가서 파스타와 피자를 먹었다. 강남까지 와줘서 고맙다며 그 친구가 계산을 했고, 나는 2차로 빙수집을 데려가서 빙수를 먹었다. 이제 서로를 알아 가게 된 단계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나중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친구는 그냥 스마트하고 무난 무난한 성격의 친구라고 생각했다.



<한남동 어느 술집>

한 4개월이 흘렀을까, 한 1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셨다.

그 자리에는 그때 그 친구를 비롯 처음 보는 사람과 친한 동생들이 함께 있었다.

나는 2차에서 3차로 옮길 때 합류했던 터라 약간 어색했지만, 그런 어색함이 어떤 이성에게는 호감으로 보였나 보다. 친한 동생이 귓속말로 "저 친구가 형한테 호감 있다고 했었는데 형은 어때?"

대학 졸업 때까지 여자친구를 한 번도 사귀어 본 적 없는 숙맥에 인기투표 0표 男인 내가 그런 말을 들으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건배를 하면서 눈이 마주치면 괜히 어색해서 눈길을 피하는 세상 바보 같은 놈이 나였으리라. 내가 합류한 지 20분도 채 되지 않았던 상황의 일이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그 회계사 친구가 나를 향해 말을 던졌다.


"준비야~나 사실 저번에 너 때문에 좀 당황했었어"


갑자기 나 때문에 당황했었다고 하니 토끼 눈을 하면서 "어?"라고 말하며 쳐다봤고,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친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사실 나도 이제 일한 지 얼마 안 돼서 금전적으로 여유롭지 않은데, 네가 그때 너무 당연하게 밥을 사달라고 해서 좀 당황스럽더라고"


나름 말발로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나였는데, 저 말을 듣고 그냥 아무 말도 못 한 채 굳어버렸다.

"내가 밥을 사달라고 했나?" "끽해야 몇 만 원 안 되는 금액인데 그게 부담스럽나?" 뭔가 머릿속에 여러 말들이 떠오르는데 자칫 이게 공격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어떤 말로 반박을 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렇게 3초 정도 순간의 정적이 흐를 때쯤 옆에 있던 동생이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에이~형 그건 아니지. 준비형이 어디 가서 얻어먹고 다니는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사주는 사람인데 밥 한 번 얻어먹으려고 형 만났겠어? 그냥 둘이 이제 알게 된 거니까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연락한 거지. 나중에 볼 땐 아마 준비형이 샀을걸?"


순간의 정적이 마법처럼 깨지고, 나머지 인원들도 그 동생 말을 듣고서는 "그래그래~누가 이 나이에 밥 한 끼 얻어먹자고 그러냐? 오버야 오버" 이러면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상황은 그렇게 넘어갔지만 도대체 저 친구는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했을까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강남에 사는 회계사에게 이탈리안 레스토랑 런치세트 가격이 그렇게까지 부담되는 건가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보다 훨씬 비싼 음식들도 주변 동생들이나 친구들에게 잘 사주고 다녔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마치 내가 밥을 사달라고 조른 사람처럼 말하는 것에 대해서, 정말로 밥 한 끼 하자는 말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싶은 마음에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이 친구의 속내를 알게 된 건 그다음부터였다.



<회계사의 생일파티 1>

그런 일이 있었지만 마음속에 담아둘 만큼 엄청 큰 이슈는 아니었기에 굳이 이 친구와 멀어질 필요도 없었고, 그냥 술김에 한 소리 정도로 넘겼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나 그 친구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아서 강남에 있는 인도 요리 음식점에 갔다. 인도 요리라는 게 먹다 보면 난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나는 종업원을 불러 난을 추가했다. 그러자 잠시 후 회계사 친구가 말했다.


"준비야, 이거 마음대로 추가하고 그러면 안돼. 이거 내가 다 테이블 당 계산해서 음식 세팅한 건데 그렇게 마음대로 주문하면 곤란해"


흠, 난 추가 비용은 고작 몇 천 원 정도이고, 이런 것까지 허락받고 시키는 게 서울 사람들 생일 파티인 건가 싶었다. 어찌 되었건 미안하다고 했지만 마치 몰래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처럼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셜커머스에서 세트 구성으로 구매한 거고 딱 거기까지가 그의 생일파티 예산이었나 싶었다. 근데 성인 남녀 4명 기준치 고는 너무 적기도 하고, 통상 생일 선물 가격이 최소 5만 원에서 시작되는데 식사 비용이 인당 15000 정도로 책정한 거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그때는 이게 깍쟁이 서울 사람들의 특징 인가 하고 넘겼다.


애매하게 배를 채우고 2차를 갔는데 근처의 테라스 카페였다. 거기서 나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12명 정도 되는 생일파티 참석자들이 각자 카드를 들고 일렬로 서서 주문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2차는 더치페이였다. 나도 조용히 가서 맨 뒤에 줄을 섰다. 창피할 건 없지만 그냥 좀 창피한 기분이랄까. 이것 역시 서울 사람들의 문화인가 보다 하고 넘겼다.


<회계사의 생일파티 2>

한 동안 이 친구와 연락을 주고받지 않고 있었는데 주변 지인을 통해 내 소식을 들었는지 이번 주 토요일 자기 생일이라 식사 자리 마련했으니 올 수 있겠냐 물었다. 솔직히 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연락 와서 초대를 해주는데 안 가긴 좀 그래서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주에 내가 썸을 타고 있던 여자친구와 사귀게 되었고 그게 그 친구 생일날이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나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이따가 같이 가려고 하는데 괜찮아?"라고 물었다. 친구 입장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게 불편할 수도 있어서 물어본 것인데 예상치 못한 답변을 받았다.


"준비야, 그렇게 당일에 말하면 어떡해. 내가 인원수 계산해서 예산을 잡고 예약을 하는데 그렇게 한 명이 늘면 내가 생각했던 비용을 넘기게 되잖아"


프랜차이즈 베트남 음식점에서 예산이라... 뭐 그 친구 입장에선 1~2만 원도 부담일 수 있는 거니까. 그래도 내가 그동안 봐온 친구들 문화에선, 자기 친구가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하면 "오 그래? 야 빨리 데려와" 이런 반응인데 예산 문제가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진 몰랐다.


"아 그래? 그럼 난 못 갈 것 같아. 미안"


여자친구에게는 차마 식사 비용 때문에 오지 말라고 했다고 말할 수 없어서, 그냥 둘이 데이트하자고 말했다. 눈치 보며 쌀국수를 먹고 식사비용보다 몇 배의 선물을 주는 것보다 그게 훨씬 더 경제적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이 친구에게 따로 개인적인 연락을 하지 않았고 지인 생일파티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그리고 왜 한남동 술집에서 내게 그런 말을 한 건지 그 비밀을 알 수 있었다.


<지인 생일파티>

명동의 한 파티룸, 파워 인싸인 지인의 생일파티는 내가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내성적인 성격의 나는 구석에서 조용히 보드카를 마시며 타고난 먹성을 발휘해 열심히 생일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옆에 앉아 있던 나보다 2살 연상의 누나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성격도 외모도 굉장히 단아한 분이었다. 자기도 낯을 가리는 편이라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적응 안 되는데 오래간만에 동생 얼굴도 볼 겸 참석했다고 했다. 그리고 뒤늦게 회계사 친구가 도착했다. 서로 마음에도 없는 반가운 마음을 표하며 인사를 하고, 빠르게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 꽃을 피우는 가운데 내가 있는 자리로 그 친구가 왔다. 나와 그 누나, 그리고 생일 당사자와 세 명 정도가 모여있었다. 그리고 굉장히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 친구가 갑자기 나한테 말했다.


"준비야, 나는 네가 정말 부러워"


"응? 뭐가?


"아니, 넌 주접을 떨어도 되게 매력 있게 떠는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게 되게 추하거든? 근데 이상하게 넌 되게 유쾌해서 매력 있어"


한남동 술집에서의 행동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역시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헛웃음을 치고 넘겼다. 다른 사람들도 내 눈치를 살짝 보는 게 느껴졌고, 아무렇지 않은 듯 혼자만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였다. 그리고 그 친구는 그 2살 연상의 의사 누나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생일 당사자인 동생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눈빛을 보내고 창가 쪽으로 갔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동생을 따라가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하, 저 형은 왜 저러는지 몰라. 자기가 관심 있는 여자가 다른 사람한테 호감 있는 것 같으면 꼭 저런 식으로 말을 해. 저렇게 티 나는데 본인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줄 아나 봐. 에휴"


퍼즐이 맞춰졌다. 한남동 술집에서도, 지금도 자기가 관심을 갖고 있는 이성이 나와 묘한 기류가 흐른다고 생각해서 나를 깎아내리기 위해 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저렇게 똑똑한 아이가 저렇게 티 나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욕망이란 게 참 무섭 다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라이벌을 제거해야 한다는 행동이 나오는 것이지 않은가. 기분이 나쁘기보다 그 친구가 살짝 짠해 보임과 동시에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게 조금은 괘씸하기도 했다.


<회계사가 아니야?>

그 친구와는 손절이라고 하기엔 모호하지만 손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10년이 지나도록 단 한 번도 서로 연락을 하지 않은 사이이기 때문이다. 연락은 하지 않지만 지인을 통해 가끔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생일파티를 열었던 그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웬만하면 그냥 그 형한테 세무 업무 맡기려고 했거든? 아니 근데 적당히 해야지. 견적을 다른 곳보다 거의 두 배 수준으로 불렀어.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나 봐. 나중에 말하니까 자기도 민망했는지 얼버무리길래 그냥 내가 하겠다고 하고 끊었어. 진짜 그 형은 왜 저러나 몰라"



"회계사라서 세무사보다 몸값이 더 비싼 거 아니야?"


"응? 누가 회계사야? 그 형 세무 산데?"


"어? 그래? 난 회계사라고 알고 있었어서..."


"형한테도 그렇게 말했었나 보네? 아니 그 형은 나랑 같은 과 선후배면서 다른 데 가서는 경영학과라고 말하질 않나, 세무사가 뭐 꿀리는 직업도 아닌데 왜 다른 데 가서는 회계사라고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어"



본인은 회계사가 되고 싶었는데 세무사에서 그쳐서 그게 한이 되었던 걸까. 왜 굳이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지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나에게도 그렇게 말을 했던 건 아마 처음에 나와 한 번 보고 스쳐 지나갈 인연 정도로 생각해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뻔히 들통날 거짓말을 할리는 없기 때문이다.


<짠돌이 오빠>

지인들 모임 중에 나보다 5살 연하의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친구와 모임에서 눈이 맞아 2년 넘게 교제를 했다. 그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한참 후였나. 인스타에서 내가 떠서 팔로우를 하고 DM을 보냈다. 그동안 잘 지냈냐고 서로 안부를 물었다. 오래간만에 통화를 하면서 수다를 떨다가 걔랑은 잘 사귀고 있냐고 물었더니, 그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한숨을 쉬면서 많은 썰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오빠는 너무 짠돌이야. 처음에 만날 때는 외제차 자랑하고 싶었는지 몇 번만 몰고 다니다가 어느 순간 운전을 안 하는 거야. 기름값이 아깝대. 그래서 사귀는 동안 거의 내 차로 데이트했잖아"


그 친구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뭐 그건 그렇다 쳐. 커플들끼리 모여서 뷔페를 가기로 해서 모였는데 자기는 속이 너무 안 좋아서 못 먹을 것 같다는 거야. 근데 내가 그 사람을 몰라? 돈 아까워서 쇼하는구나 싶어서 이거 내가 낼 테니까 그냥 먹자 했더니 자기는 진짜 속이 안 좋아서 그렇대. 그래서 우리 밥 먹는 동안 차에서 좀 쉬겠다는 거야. 이젠 나도 이골 나서 그러라 했지. 근데 내 친구 커플이 식당 오다가 편의점에 들렀는데 그 오빠가 거기서 라면을 먹고 있었다는 거야. 내가 그 소리 듣고 얼굴이 얼마나 빨개졌는지..."


나름대로 살면서 짠돌이들은 적잖이 봐왔지만 정말 대단하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저렇게 살면 내 자산은 알뜰살뜰하게 모을 수 있겠지. 그런데 그런 모습이 검소해 보이는 게 아니라 궁색하고 인색해 보인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은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고, 개개인의 성향은 비슷해 보이지만 똑같은 게 단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다양성을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도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는 무얼 하든 딱히 신경을 쓰진 않는다. 다만, 피해를 주지 않더라도 내 옆에 둘 사람이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각자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인생은 유한하고, 결국 우리 모두는 죽는다. 이 불변의 진리 앞에서 지나친 욕심과 질투라는 게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내가 갖기 위해 누군가를 깎아내리거나, 내 손에 쥔 돈을 지키기 위해 타인에게 기생하는 삶을 살면서 결국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돈?


사회에서 만난 몇 안 되는 동갑 친구였기에 나름 기뻤고, 새로운 사람을 알아감으로써 오는 인생의 재미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했었다. 그러나 내 결과 그 친구의 결은 너무도 달랐고, 인색하게 구는 그 태도는 딱히 개의치 않으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처럼 이용했다는 게 내 기준에서는 불쾌한 부분이다.


적어도 내 인생에서 그런 친구를 옆에 둘 여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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