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의 이야기
소(丑)
소는 인내심과 근면함의 상징이지만, 그 이면에는 쉽게 꺾이지 않는 고집과 단단한 자기 세계가 자리 잡고 있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데는 능하지만, 타인의 조언에는 귀를 닫고, 오로지 자기 기준으로만 판단하려는 외골수 기질이 강하다. 감정 표현이 서툴러 오해를 사기 쉬우며, 소통보다는 독단에 가까운 방식으로 주변과의 벽을 만든다. 한 번 등을 돌리면,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단절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사회성의 문제일까
자신이 보는 세계에 대한 절대적 믿음일까
누군가에게는 묵묵히 일을 잘하는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시뻘건 눈을 한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는 연민의 대상이자,
숨 막히는 대상이기도 했다.
<그와의 첫 만남>
대기업 퇴사 후 나는 별별 아르바이트를 다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중에 하나는 단기 보안업체 아르바이트였는데,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시험을 볼 때 시험문제 유출 관련 보안 업무를 담당하는 일이었다.
딱 두 번 했는데 한 번은 기업 직원들 시험 보기 전 문제 유출을 방지하는 업무로 1박 2일 머물며 근무를 했고, 한 번은 30일간 속초에 있는 리조트에 머물며 수능출제위원들 문제 유출 보안 업무를 했다.
그리고 운명처럼 그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 하는 일이라 어색하기도 했지만 딱히 서있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어서 업무 난이도는 굉장히 낮았다. 다만 지루함과의 싸움이랄까. 그러다 보니 이 일은 같이 일하는 사람과 그래도 어느 정도 합이 맞는 게 중요했다. 나와 같이 근무할 사람이라며 소개를 받는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나와 결이 맞지 않음을 직감했다.
뭐랄까,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다 온 히키코모리 느낌이었다.
"저보다 한 살 많으시네요? 형이라고 부를게요"
그는
거북목을 하고 눈동자만 굴려서 나를 힐끗 보더니,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2:8 가르마에 머리는 젤을 얼마나 발랐는지 번쩍번쩍 광이 났다.
내성적이고 말수가 없는 타입인지 말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아서, 굳이 내향인인 나도 텐션을 올려 분위기를 전환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30년 넘게 살며 쌓아온 나의 빅데이터들이 빠르게 요동치며 몸에 신호를 보냈다. 나와는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와 나는 한 방을 썼는데 업무를 마친 방 안,
방 안 가득 메운 침묵 속에서 나는 휴대폰만 볼뿐이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자 조용히 리모컨을 찾아 TV를 켰다. 순간 그의 눈은 TV를 향했고 빠르게 다시 주섬주섬 옷을 챙기며 흰색 와이셔츠 깃을 정성스레 닦았다.
그렇게 1시간 조금 넘게 TV를 보고 있는데 불이 꺼졌다.
"저...자야되니까 TV는 꺼주세요"
들릴 듯 말듯한 음량 1 정도의 강도로 그가 말했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채 되지 않았다. 이렇게나 빨리 자는 사람이 있구나 싶으면서도 같이 생활하는 공간이니 어쩔 수 없이 TV를 끄고 나도 반강제 취침에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 귀를 찢을 듯이 울리는 알람에 눈을 떴고 부은 눈을 가만히 뜨며 휴대폰을 봤는데 새벽 5시였다. 샤워하는 소리와 드라이 소리 때문에 계속 잠을 청하긴 힘들고 나도 그분 덕에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자기 자야 되니 TV를 꺼달라면서, 새벽 5시에 알람 맞추고 드라이 쓰는 건 무슨 경우야?"
나는 속으로 참 이상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다.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불편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에잇, 어차피 오늘 일 끝나면 안 볼 사인데 뭐 어때"
1박 2일 업무를 마치고 담당 팀장과 인사를 하며 집으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몰랐다.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2014년 10월 속초>
보안업체 연락을 받고 속초의 한 리조트에서 한 달간 숙식하며 일을 하게 되었다.
11월 수능을 앞두고, 수능출제위원들이 이 리조트에 들어와서 수능문제를 만드는데, 외부와의 완벽한 차단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리조트 전체 외곽 경비를 해야 했다. 수능문제가 이렇게 삼엄한 보안 속에서 출제되는지 알게 되었다. 대규모 인원이 투입되는 만큼 나와 같은 수십 명의 아르바이트생들이 모였고, 그들의 직업 또한 각양각색이었다.
대학교 휴학 중에 용돈을 벌기 위해 온 20대 친구를 비롯, 배우 지망생 다수와 와이프로부터 떨어져 자유로운 시간을 갖고 싶어 지원했다는 유부남 형님까지 정말 연령과 직업군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그곳에 내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그가 있었다.
"어?...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그와 눈이 마주치고, 내가 동생이니까 먼저 인사를 건넸는데, 그는 나를 보고 고개를 돌리며 우두커니 서있었다.
"와... 진짜 뭐지? 병 x인가?"
속으로 쌍욕이 나왔다. 둘 사이에 어색함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그래도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었는데 속된 말로 쌩을까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나도 그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속초리조트에서의 30일은 정말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다양한 사건들을 겪게 해 줬고 그중에서 그와의 갈등이극에 달했는데 승자는 나였기에 내 입장에서는 그냥 재미있는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꼰대의 총애를 받다>
여기 온 사람들은 A라는 보안업체에서 모집된 인원들이다.
그리고 이 업체는 이 업무를 주관하는 기관에서 선정된 곳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리베이트 같은 게 없을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알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음을 내 눈으로 생생히 목격했다. 우선 그곳에서 왕은 당연히 그 기관의 담당자이고 그 또한 그곳에서 30일간 머물며 관리감독을 한다. 딱 보면 알 수 있는 전형적인 꼰대 스타일이었다. 다부진 체격에 부리부리하고 호탕한 웃음. 과거에 운동을 좀 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그랬다.
이런 꼰대들의 특징은 연설하는걸 참 좋아하는데, 보안업체 직원들과 우리들을 모아놓고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통상 이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썩은 동태눈깔을 하며 듣기 싫다는 표정을 짓는데 나는 이런 꼰대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꼰대라는 게 적이 되었을 땐 힘들지만 아군이 되었을 때 이보다 더 든든한 방패가 없는 법이다.
나는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 사람과 아이컨택을 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가끔은 고개를 끄덕여주며 눈을 맞추니, 어느 순간 계속 나만 보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갑자기 내 칭찬을 했다.
"봐봐. 저 친구 장교 출신이라고 했지? 자세가 다르잖아"
모두의 시선이 나한테 집중됐다.
그 순간 내 인사를 무시한 가자미같이 생긴 그 형은 찢어진 눈으로 나를 째려봤다. 그냥 쳐다본 것 일 수 있지만 눈매가 날카로워서인지 째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보안업체 직원들이 유독 나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취한 게 있는데, 내가 장교 출신이라는 부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게 왜 중요한지 나중에 알게 되었다. 경비 업무를 하기 위해서 일정 시간 수업을 듣고 이수증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장교 출신이면 수업을 듣지 않고도 그 증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즉, 그들에게 있어 나는 혹시 모를 점검이 나왔을 때 부족한 인원을 대체할 수 있는 희망이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그 이수증을 갖고 있는 사람은 불과 5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꼰대가 거기서 왕과 다름없는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고, 나를 향한 꼰대의 총애는 끝없이 높아졌다. 가령 리조트에서 정문 바리케이드까지 300m 가까이 되는 거리인데, 그 꼰대가 나가면 무전기로 알려준다. 그러면 정문초소에 있는 사람이 문을 열어줘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문을 두드리면 가서 열어주지만, 나는 대충 도착할 시간에 맞춰 발걸음 소리와 대화하는 목소리를 듣고 문 앞에 설 때쯤 자동문처럼 열어주었다. 그런 사소한 것에 꼰대는 감동했던 것 같다
"이야~역시 달라. 다르다니깐? 수고해!"
꼰대는 아르바이트로 온 그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지만 나에게만은 늘 말을 걸어주고 칭찬을 해줬다. 그러다 보니 보안업체 대표와 직원들도 내심 내 눈치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활한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 나도 내가 가진 이 작은 권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게 가자미를 닮은 형 눈에는 눈엣가시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소처럼 일하는 성실한 그 형>
군대에서 경계근무 서는 것처럼 리조트 정문을 비롯해 총 5개의 초소가 있었고 1시간씩 밀어내기식 근무를 섰다. 정문은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앉아서 근무를 하는 대신 차량들이 들어가고 나갈 때마다 10m 가까이 되는 철문을 열고 닫아야 하는 귀찮음이 있었다. 대신 다른 초소들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편할 수 있지만 밖에서 초소와 초소 사이를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주변을 살펴야 했다. 10월, 속초의 칼바람은 생각보다 매서웠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체력보다는 지루함과의 싸움이 컸다. 그래서 같이 근무하는 사람끼리 합이 잘 맞아야 이런저런 얘기도 하면서 시간을 금방 보낼 수 있었다.
그 형은 근무 중 그 어떤 수다도 떨지 않기로 유명했고, 업체에서 시킨 업무를 가장 완벽하게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초소와 초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정말로 정체불명의 종이들이 떨어져 있지 않은지 하나하나 살피고, 철조망을 일일이 만져가며 끊어진 부분들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런 모습을 보안업체 직원이 보고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칭찬하는 말을 해주니 그 형의 볼이 발그레해지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늘 무표정의 날카로운 눈으로 사람을 훑어보는 그에게 저런 모습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별거 아닌 그 한 마디가 그에게는 꽤나 자존감을 올려주는 행동이었나 싶다.
그래서일까? 자기 스스로 뭔가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해서?
그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고,
그 선을 넘어온 순간 나와의 미묘한 관계에서 오는 갈등이 화산폭발처럼 터졌다.
<너나 잘하세요>
어느 조직에서나 인정받고 싶어서 튀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
상사는 좋아하지만 나머지 팀원들은 싫어할 그런 행동들.
가장 나이가 많은 외향적인 형님이 있었는데,
1주 차가 좀 지났을 때 어처구니가 없는 발언을 했다.
"자자~우리가 일 투입되기 전에 좀 더 결속력도 다질 겸 30분 전에 모이도록 합시다."
보안업체 직원들이야 아르바이트생들이 그렇게 해준다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었으니 그 말을 듣고 내심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 가자미 형님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머지 인원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누구도 그 불만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내가 총대를 메고 말을 했다.
"싫은데요? 저희 지금 점심시간 1시간도 보장 못 받고 식사 끝나고 바로 투입되고 있는 거 아시죠? 그리고 10분 전에 도착해서 장비 착용하고 투입되는데 전혀 문제가 없는데 왜 굳이 30분 전에 와야 하죠? 30분 전에 올 사람은 그때 오시고 전 이전과 동일하게 하겠습니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러나 보안업체 직원도, 그 형님도 반박을 하지 못했다.
내 말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근거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꽁꽁 얼어붙은 분위기를 뒤로 하고 오와 열을 맞춰 초소로 투입됐다.
초소까지 가는 동안 다른 인원들이 나한테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와~저 진짜 그 말 듣고 개빡쳤는데 형이 나서줘서 너무 고마웠잖아요"
모두가 신이 나서 나에게 고맙다고 말을 하는데, 그 가자미 형님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도...시키는건 해야 되지 않아..?"
시끌벅적한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순간의 정적이 1초간 흘렀다.
"왜 시키는 대로 해야 되는데요? 30분 전에 갈 사람은 가면 되는 거죠"
나는 뒤에 있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툭 던지고 초소로 투입됐다.
그리고, 며칠 후,
근무를 마치고 리조트 로비에 모여 특이사항을 보고하고 들어가려는데, 가자미 형님이 이상한 의견을 냈다.
"저... 정문 초소 근무하면서 컨테이너 안에 있지 말고 밖에 나와서 근무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보안업체 직원들이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동조하면서 다시 분위기는 아침과 비슷한 상황이 되었다. 정문 초소도 다른 초소와 마찬가지로 밖에서 근무를 서는 게 맞는 거라며 분위기를 몰아갔다.
"정문은 시야가 탁 트여서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봐도 다 보이고, 차량 출입 통제 임무인데 굳이 저 칼바람 맞으면서 나와서 서있을 이유가 뭐죠? 전 납득이 안 되는데요?"
내가 바로 반박을 했다.
그러자 보안업체 직원이 내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정문 초소는 차량 출입 통제뿐만 아니라 그 부근 경계도 원래 같이 하는 게 맞아요. 그러니까 저분 말대로 하도록 하죠"
보안업체 직원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나도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러니까 그 경계근무가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고 가능하다니까요? 시야가 다 트여있잖아요. 허허벌판처럼 앞에 다 트여있어서 바람도 센데 그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책임지실 건가요?"
분위기가 험해지자, 보안업체 팀장이 나섰다.
"워워~일단 그 문제는 내일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일단은 들어가서 쉽시다. 정 힘들면 한 명씩 돌아가면서 서는 걸로 하자고. 오늘도 수고 많았어요"
그렇게 그 자리는 마무리가 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사람들은 열이 받았는지 누구 방에 모여서 간단하게 맥주나 한 잔 하자며 우리 방으로 모였다. 물론 그 가자미 형님은 오지 않았다.
"야~진짜 얘네들 너무하네. 이제 정문 근무하면서 교대로 밖에 있어야 해?"
모두가 입을 모아 불만을 토로했고,
"전 교대로라도 할 맘 없어요. 내일 대표한테 제가 말하려고요"
나는 그들의 희망이었다.
그리고 보안업체 직원들과 가자미 형님한테 있어선 천하의 때려죽일 놈이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
나와 가자미 형님은 정문초소 근무를 같이 서게 됐다.
나는 컨테이너 박스 안에 있었고, 가자미 형님은 밖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망부석처럼 서있었다.
그는 30분이 지나자 안으로 들어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교대해야 해"
그 말을 듣고 나는,
"네? 전 밖에서 근무 안 할 건데요? 안에 들어와 계세요"
내 말을 들은 가자미 형님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나를 씹어먹을 표정으로 째려보았고, 나도 한참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가 칼바람을 맞으며 서있는 그였다.
그때, 리조트 로비에서 무전이 왔다.
"대표님 지금 나가십니다"
3분이 조금 지나서, 나는 철문 앞쪽으로 나가서 대표의 발걸음 소리에 맞춰 문을 열어주었다.
그 꼰대 대표는 호탕한 웃음과 함께,
"역시 달라. 아주 수고가 많아!"
그렇게 대표가 내 어깨를 두드릴 때 나는 이때다 싶어 말했다.
"대표님, 어제 보안업체 직원이 정문초소 인원들 컨테이너 밖에서 근무하라고 했는데, 현실적으로 안에서 근무해도 전혀 지장이 없는 상태라서요. 이전처럼 계속 안에 있다가 차량 출입 때에만 나가도 괜찮겠습니까?"
대표 옆에 있던 보안업체 팀장 표정이 일그러진 게 보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 말을 대표는 잠깐 생각을 하더니,
"그래? 그렇게 해. 추운데 뭐 하러 나와있어. 잘하고 있어. 계속 그렇게만 해!"
나는 옅은 미소를 띠며 초임장교시절의 패기 있는 목소리로 "네!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그렇게 대표가 떠나고 가자미 형님을 쓱 쳐다보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자존심이 상한 건지 그는 대표가 안에서 근무해도 된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밖에서 망부석처럼 서있었다.
이 사건이 트리거였을까.
가자미 형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야 말았다.
<뒷담화>
어느 날, 보안업체 직원이 나를 불러 말했다.
"준비씨, 그 가자미씨랑 사이 안 좋아요?"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보안업체 직원들은 접점이 크게 없었기에 모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저 말을 왜 하는 걸까 싶었다.
"네, 좋진 않죠. 예전에 한 번 같이 일했었는데 여기 와서 마주쳐서 인사했는데 쌩까던데요? 그런데 왜요?"
보안업체 직원은 한 발짝 내게 가까이 와서,
"아니, 아까 전에 우리한테 와서, 준비씨 근무태도가 불량하다고 말을 하길래, 그런 거 뒤에서 말하는 거 좋지 않으니까 하지 마시라고 했거든요. 또 준비씨 일 잘하고 있어서 대표님도 좋아하신다. 그러니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라고 하고 돌려보냈어요"
결국 선을 넘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간질이다.
나에게 불만이 있으면 본인이 직접 말을 하면 될 문제인데, 성인이 되어서 보안업체 직원들한테 내 험담을 해서 나를 골탕 먹이려는 그 속내가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보안업체 직원입장에서야 나와 사이가 틀어지면 어차피 본인들이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그 형님 편을 들어줄 리도 없었다. 나는 말해줘서 감사하다고 전하고 다시 초소 근무에 투입했다. 굳이 이 얘길 들었다고 가자미 형님한테 가서 따질 마음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후,
모두가 한 방에 모여 치맥타임을 가졌다. 삼삼오오 모여서 그동안 쌓인 이야기들과 밖에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 등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정말 생뚱맞은 타이밍에 나온 그 한 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쳇"
내가 말을 하고 있는 도중에 말고 말 사이의 공백에 들리는 그 한 마디의 존재감이 어찌가 컸던지, 10명이 넘는 모두가 고개를 돌려 가자미 형을 쳐다봤다. 당황할 법도 한데 그런 기색 하나 없이 나를 계속 째려보면서 한 손으로는 맥주캔을 꽉 쥐고 있었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을까. 가자미 형님 옆에 있던 동생이 가자미 형 어깨에 손을 살짝 올리며,
"형, 취했어요? 왜 그래요..."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노려봤다.
누가 보면 마치 내가 부모를 죽인 원수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분노가 가득한 살기 서린 눈빛이었다.
무덤덤하게 밭만 갈던 황소가 흥분해서 빨갛게 충혈된 두 눈을 동그랗게 부라리는 모습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딱히 위압감 같은 건 없었다. 나는 화가 나면 굉장히 차분해지고 냉정해지는 성향이기도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저 사람과 대립해서 내가 질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불만 있으세요? 말을 하세요"
한심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건조하게 툭 내뱉은 말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콧소리를 심하게 내면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아! 근데 형, 보안업체 직원한테 제 뒷담화 했다면서요?"
순간 주변이 웅성거렸다.
그리고 그의 눈빛이 당황한 듯 흔들리며 아래로 향했다.
아마 그 얘기가 내 귀에 들어왔을 거라고 생각도 못한 듯했다.
마치 자기의 치부를 들킨 것처럼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고,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뒷담화 하는 거야 형 자유고 딱히 기분 나쁘지도 않아요. 근데 제가 근무를 제대로 안 했다고 말했다면서요? 그럼 내일 가서 이 일 공론화해서 누가 일을 잘하고 있는지 확인해 볼까요?"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옆에 있던 다른 동료들이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형!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마시고 해산하시죠",
"에이 뭘 그렇게까지 해요. 형 기분 풀어요"
"야야~너무 신경 쓰지 마"
"너 내일 진짜 그렇게 말한 건 아니지? 하하"
이곳저곳에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이런저런 말들을 던지면서 주변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가자미 형님은 내 얼굴을 보는 게 불편한지 이전과 다르게 내 눈을 마주치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탈하게 30일간의 알바를 끝마쳤다.
사회는 다양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뒤섞여 있다.
나와 다른 의견,
나와 다른 취향,
나와 다른 철학을 갖고 살아가고 그게 첨예하게 대립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어느 정도 사회화가 된 사람들끼리의 사이에서 그 갈등을 대화로 풀어나가고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다. 만약 그 형님이 어느 정도 사회화가 된 사람이었다면 내 인사를 그렇게 무시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간질하려는 행동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은 칭찬에도 기쁨을 감출 수 없는 그런 순수한 마음도 그 안에 있겠지만 타인과 함께 섞여 행동하는 방법을 몰랐을 것이기에 한편으로는 짠한 마음도 있다. 시키는 일에 있어서는 무식할 정도로 충실하게 하는 그가 좀 더 사회화된 모습을 갖추고, 사람들 속에서 어우러질 수 있는 유연함이 있었다면 어느 조직에서나 일 잘하는 우직한 소라고 인정받지 않았을까? 외골수에 자존감이 낮은 소는 앞뒤 상황을 보지 않고 시뻘건 눈으로 빨간 망토만 보고 들이받는 투우장의 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