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의 SNS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직업은 한국 대통령”이라는 말이 화제가 되었다. 그 말에 "한국, 축하한다!"라는 댓글이 더러 달렸다니, 자신들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놀라움과 함께 자기네 사찰정치 체제를 의식한 풍자도 담겼던 것으로 보인다. 권력의 정점에 오른 사람조차 헌법 앞에 책임을 져야 하는 체제를 향한 부러움과 불안이 교차했던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서 우리는 권력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는 한 인물을 만난다.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며 큰 무리의 관심을 끌었던 세례 요한이다. 예루살렘의 종교 권력자들에게 위험인물로 비쳤던 그에게 조사단이 파견된다. 그들의 질문은 이랬다. “너는 누구냐?”
그것이 단순한 신원조회용 질문이 아닌 줄 요한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질문의 요지를 분명히 드러내는 말로 답한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물음에는 없었던 '그리스도'를 넣은 것이나, 헬라어 구문상 굳이 필요없는 주어를 밝힌 것은 강조를 위함이다. 그러니 속 뜻은, "나는 아니지만, 그리스도는 이미 와 계시다"로 들린다.
조사단은 다시 묻는다. “그러면 너는 엘리야냐? 아니면 그 선지자냐?” 그럴수록 요한의 답은 점점 더 짧아진다. “나는 아니다.” “아니다.”
이것은 거의 자기를 비우다 못해 '해체'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자기에게 쏠린 기대의 불빛은 하나하나 꺼트리고, 대신 다른 한 분에게로 관심을 옮기는 스위치 같은 것이다. 결국, 자기가 아닌 것 말고 바른 정체를 밝히라고 다그치자,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외치는 자의 소리다. (요 1:23b)
대중의 이목과 권력을 얻지 못해 안달인 세상에서 이보다 더 분명하고 겸손한 자기 인식이 있을까? 당시 조사단을 파견한 바리새인이나, 조사단을 자처한 제사장, 레위인만 해도 그랬다. 그들이 주도하던 성전 중심의 종교 권력에 반하는 "광야의 소리"를 제압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신의 권위 나부랭이에 목맬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보냄 받은 자였다. 그러니 자신은 구원의 메시지가 아니며, "내 뒤에 오시는 분을 주목하라!"라고 외치는 '소리'일 뿐이라고 말이다.
나아가,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오죽 위대한 분이시면,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하였을까? 탈무드는 당시에 통하던 질서에 관해 평하길, "제자는 스승에게 못 할 일이 없다. 그러나 스승의 신발 끈 푸는 일만큼은 안 된다"고 했다. 그것은 명백히 종이나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암묵적 규율에 따르면 심지어 종이라 하더라도 유대인에게는 시킬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 온 나라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 곧 오실 분의 신발 끈 푸는 일조차 감당할 수 없다니, 그분의 존재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주연의 존재감을 이렇게나 드높이는 조연, 성경은 이 역할을 일컬어 '증인'이라고 부른다. 자신이 무대 중앙에 서려 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그 자리를 내어 드리는 태도, 청중을 향해 그분에게 집중하라고 외치고 자신은 사라지는 이 말이다. 세상은 이것을 '극한 직업'으로 분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증인의 본인 세례 요한은 주님으로부터 '지극한 칭찬'을 들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마 11:11)
우리는 증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