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은 다리다 (요 1:6-8)

by Those Dim Reflections

커피는 아침 일찍부터 한잔 정도 마셔주어야 정신이 집중되는 듯한 이 기분은 일종의 직업병일지도 모른다. 이럴 때 쓰라고 아내가 우리나라에서부터 챙겨준 커피 믹스가 여럿 가방 안에 들어 있었지만, 비행기가 아침 일찍 도착하고 보니 아직 숙소에 체크인하기에는 일렀다. 그래서 앙꼿(angkot) -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서는 미니밴 - 을 타고 커피숍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이마저 허탕을 거듭해, 운전사와 내가 아는 곳을 합쳐 네 곳도 넘게 곁눈질만 해댔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탐사를 게서 멈출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예의 그 다리까지 갔다. 암본의 명물, JMP(Jembatan Merah-Putih)말이다. 깊이 파인 만을 사이에 두고 암본 비행장과 시내 중심은 주방 집게 모양으로 갈라져 있다. 시내에 숙소를 잡고 일을 본 후 아침 비행기를 타려다 그 먼 길을 돌아 비행기를 잡느라 촌각을 다투었던 기억이 있다. 그 다리를 오늘, 뜻밖에 커피 찾아 삼십 리를 하느라 다시 만난 것이다.

다리가 개통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야기를 주고 받다 보니 앙꼿 운전사는 어느새 이 다리 때문에 암본이 얼마나 살만해졌는지 역사를 풀어놓는다. 이곳 주민이 아닌 나도 깊이 공감하는 바다. 헤엄쳐도 건널 만큼 가깝지만 긴 줄을 서서 페리를 탈 양이 아니라면 몇 시간 걸려 돌아가야 했던 길에 놓인 이 다리는, 그래서 자신을 이 다리로 자처하는 많은 사람에 의해서도 그 존재감이 띄워지곤 했다.

돌아가야 할 길이 멀수록, 아니면 아예 닿은 곳이라곤 달리 없을 때 다리는 돋보인다. 다리를 세운 이나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것을 엄청난 상징물로 알고 자랑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다리 자신이 그 역할 너머 사람들의 환호에 도취해서는 안 된다. 오가는 걸음에 밟히고 바퀴도 잘 굴러가게 반듯할 일이지, 과한 치장으로 다리 위에 차량 정체가 생기는 것은 더욱 곤란하다.

요한복음 1장을 읽다가, 세례요한이 나오는 대목에서 이런 묘한 경계심이 든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요 1:8)

이 구절이 초대교회 시절에 이미 생겨나기 시작한 소위 '요한 파'를 염두에 두고 쓴 말은 아닐까 하고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주석가들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복음서를 기록한 동명이인의 요한은 세례자 요한 자신으로서는 얼마나 충실한 증인이었던지를 이야기한다. 다리로 치면, 그가 거치적거림 없이 오직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과 세상 사이에 다리가 되어주었던 증거를 거듭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의 역할이란, 오직 사람들이 거룩하신 빛 앞에 나아오도록 자기들의 어둠을 각성하게 하는 다리 이쪽 편의 준비와, 다가오시는 빛을 향하여서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드디어 공생애를 시작하시도록, 하늘로부터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과 성령이 임재하시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니 '세례 요한'이라는 그의 별명은 그가 베푼 세례와 광야의 외침 자체로 독자적 사역의 신기원을 이룬 것을 기념하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증거자로서 그의 생애는 이미 값졌지만 그를 동시대의 다른 요한들과 구분하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을 높이자고 흔한 이름 말고 특출한 무엇을 명예의 전당에 새기려고 한다면, 그 바람에 오히려 귀한 소명을 그르칠 수 있다. 마침내 찾아 헤매던 커피를 한 잔 들이켜고, 동역단체 협약식에 좀 단정한 모습으로 임하기 위해 이발까지 한 후에 숙소에 체크인하고 보니, 자동으로 불이 들어온 TV에서는 지난 숙박객이 틀었던 것으로 보이는 어린이 채널에서 앙증맞은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런데 그 노래가 하필 "런던 다리 무너졌네(London bridge falling down, falling down ...)"다. 커피 한잔 마시자고 다리 너머까지 갔다 온 것이 이쯤 되면 시간 낭비는 아니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그날 저녁에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은 증인이 되는 것이 세례요한만의 책임은 아니었다고 하신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8)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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