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지만 생소하신 분 (요 1:1-2)

by Those Dim Reflections

나와 아내가 왐본어 성경번역을 막 시작했을 때, 창세기 들머리부터 우리에게 난제로 다가왔던 것이 있다. "하나님"을 그들의 언어로는 무슨 이름으로 표현할까였다. 당시까지 왐본 사람들은 자기들 말로 예배하거나 기도한 적이 없었다. 화란의 교회 개척 선교사들이 복음을 인도네시아 공용어인 바하사(Bahasa)로 소개하였으므로, 예배의 전례나 의식 역시 그 언어권 교회에서 빌려 온 것들이었다. 그러니 하나님을 부르는 말도 "알라(Allah, 신)" 또는 "뚜한(Tuhan, 주님)"으로 배웠지만, 문제는 그 언어만큼이나 하나님도 이방인의 하나님으로 멀게 느껴지던 터였다.

고심 끝에 우리는 그들 말로 "따못꼼밥(Tamotkombap)"이라 옮기기로 했다. 직역하자면 '밀림의 주인/아버지'란 뜻이다. 평생 울창한 숲을 터전으로, 전통적으로는 집조차 수십 미터 자란 나무 꼭대기에 마루를 걸치고 지붕을 얹은 공중 가옥에 살았으니, "따못꼼밥"은 그들에게 '세상의 주인'을 의미했다. 길흉화복이 그에게서 나오고, 오류의 창조자 "게놋(Genot)"과 대조되는 창조의 참 권위자로도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름에 얽힌 오해 역시 적지 않았다.

성경번역의 원리와 적용에 골몰하며 우리가 참고했던 중요한 예는 세계 각처의 번역 사례만 아니라, 성경 속 사도 요한의 선택이었다.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요한복음은 그분을 "로고스(λόγος)"라고 썼다. 유대인에서 헬라 문화권의 이방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독자층을 염두에 두고, 태초부터 계셨으나 독자들에게는 금시초문인 그분의 정체를 설명하려니 사도 요한의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랬던 그의 결정인즉슨, 당시의 청중에게 널리 회자하던 개념을 빌려 그분의 정체를 소개하되, 그 이름만 들어서는 깨달을 리 없었던 심연의 진실을 알리려고 그 용어의 정의를 허문다.

유대인은 유대인대로, 헬라인은 헬라인대로, 당시까지 많은 숙고와 반추를 거듭했던 "말씀" - 히. 다바르(דָּבָר)/헬. 로고스(λόγος) - 개념은 가히 하나님께서 그때를 위해 준비시키신 것이랄 만했다. 탈굼역 - 히브리어 성경을 읽을 때 당시 유대의 일상어였던 아람어로 청중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한 구어체 주석 - 전통으로 보기에, 유대인 회당에서는 구약 성경을 읽을 때 "말씀"을 천지 창조의 대리인으로 대치하여 읽었던가 하면, 헬라 철학은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B.C. 5~6세기)에서 필로(Philo, B.C. 20~50)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에 걸쳐 로고스의 의미에 새로운 해석을 꾀하였다. 유대계 헬라 철학자 필로는 급기야 로고스를 신과 세상을 연결하는 중재자이자 창조의 도구, 하나님의 의지와 지혜를 반영하는 존재로 소개하기에 이른다.

이렇듯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까지 꺼풀에 꺼풀을 벗긴 양파 속 같은 로고스 개념의 정제 과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재하셨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유일신 하나님 외에 달리 하나님이 계실 수는 없다는 유대인의 유일신 사상이나, 추상적 이성이자 논리인 로고스가 인격일 리 만무하였던 헬라인의 생각을 깨뜨리고, 요한은 로고스의 본성을 이렇게 설명하니 말이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유대인이 듣기에 그 얼마나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을까? 주님께서 같은 뜻의 말씀을 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예외 없이 돌을 집어들곤 하였다.(요5:17~18, 8:58~59, 10:30~31) 차마 귀를 열고 들을 수 없었던 명백한 신성모독이었으니, 감히 그런 말을 한 자는 죽어도 싸다고 여겼던 것이다. 헬라인이 보기에도 기상천외한 소리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신의 세계인 이데아(Idea)를 구현하는 중재자는 되더라도 로고스를 신이라 생각한 적은 없으며, 나아가 그가 창조자, 구원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아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엄연히 그는 그런 분이셨다. 자신의 정체를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출3:14)라는 하나님 전매특허의 권위로 설명하실 수 있는 분, 그리고 하나님과 한 분이시지만 동시에 "그분을 향하여" 계신 - 번역에 따라서는 "하나님과 함께"로 해석되기도 하는 - 독립적 인격체 하나님으로서 말이다.

익숙한 용어는 우리가 완전히 생소하게 느끼지 않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친숙한 용어로 이해할 때, 되려 그 신적 특성을 우리 이해의 틀에 가두고 마는 낭패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니 다시 보자. 말씀이신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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