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화가 폴 세잔(Paul Cézanne)의 대표작 중 하나인 <생트 빅투아르(Mont Sainte-Victoire)>는 한 점이 아닌 연작이다. 물론 어느 작가 할 것 없이 한 대상을 그리기 위해 때론 수백 번 가까이 스케치를 한다고 하지만, 그는 이 산 그림을 완성하고도 다시 그리고, 여러 해 지나 또 그렸다. 그러면서 먼 산 아래 다채로운 풍경이 드러나게 그린 적이 있는가 하면, 다음에는 바짝 다가서며 화면 가득 집채만 한 산을 그렸다. 계절 따라 다른 색, 다른 질감을 표현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 산 아래 어디가 세잔의 고향이었단다. 소나무 가지 하나, 그 뻗은 모양새의 특색을 표현할 수 있어야 존재의 존엄성을 살리는 것이라 여겼다니, 그래서 그가 현대 미술의 아버지란 평을 듣는 것이다.
세상에 널린 산 하나를 그리는 화가의 붓끝이 그렇다면, 하물며 자기 글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소개하는 복음서 저자의 언어랴. 그 글을 읽기에 따라 독자의 생명이 달린 일이었으니, 저자는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골라 쓰는 일에 여간 신중을 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한복음의 서두를 읽으며 드는 생각이 그렇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 1:1)
복음서 중 하나인 마가복음의 시작과 비교해 보더라도 요한복음의 시선은 남다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막 1:1)이라며, 마가는 이 땅에 오실 메시아를 예언했던 선지자들의 말과 그 성취에 집중한다. 그래서 드는 의문은, 같은 예수를 관찰하고 그의 행적을 소개하는 저자들의 시각이 이렇게나 달라도 되는가 하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놀라운 것은 세상의 출현을 알리는 창세기 1장 1절과 맞대결을 벌이는 요한복음 1장 1절, 그 시작의 대범함이다.
다만, 세잔의 그림만 보더라도, 요한복음이 흔히 공관 복음서라고 불리는 마태나 마가, 누가복음과 현격히 다른 것은 조금 이해가 된다. 요한복음을 제외한 세 복음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을 입증하려 했기에, 예언된 메시아의 모습과 일치하는 예수의 족보와 탄생, 예고된 갈릴리 사역으로부터 복음의 빛이 비친 것을 보여주는 것은 무척 자연스럽다.
그에 비하여, 요한복음은 복음의 무대를 설정하는 것부터 다르다. 마치 이렇게 선언하는 듯하다. "이제까지 알던 복음의 시작은 잊으라. 복음은 베들레헴에서 나신 처녀의 아들이나 심지어 수백 년 전의 예언으로부터 시작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으로부터 시작한다." 여기 쓰인 "태초"라는 표현만 해도 심상찮다. 창세기와 요한복음 서두에 나란히 등장하는 이 표현은 구약성경의 헬라어 버전인 70인역으로 보더라도 요한복음이 창세기의 표현을 떠올리려 한 것이 맞다. 하지만 창세기의 태초는 '창조의 시작점'을 가리킨 반면, 요한복음의 태초는 아예 그 시작을 헤아릴 길 없는 '영원 전'이다. 여러 권의 시리즈로 구성된 서사물에서 가끔 후속편은 전에 등장한 것보다 이전 이야기를 꺼내며 그간의 전개를 훨씬 능가하는 역사적 지평을 펼쳐 보인다. 요한복음이 바로 그 격이다. 신약 시대에 와서 창세기의 기원을 과감히 앞지르는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창세 이전, 하나님과 함께 거룩한 연합을 이루셨으면서 동시에 독립적 인격체로 계셨던 분을 "말씀"이라고 소개하니 말이다. 더 들여다보자면, 이때 그분의 존재적 특성을 기술하는 동사 하나까지 보통 무게를 지닌 것이 아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처음 소개하셨을 때 쓰신 표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에서 그분의 거룩한 존재감을 드러낸 권위 있는 동사 표현이 고스란히 쓰였다. 누구에 의해서 지음 받거나 태어난 분이 아닌 스스로 영존하시는 분으로, 말씀은 바로 그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고 말이다.
사도 요한은 바로 이런 근원을 가진 분이 거기로부터 어찌 이 땅으로 오셨는지를 보일 참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약속된 메시아만 아니라 참 하나님이심을 보이려고 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요 20:21a). 그러니, "또 한 권의 복음서로군!" 하고서 펼칠 책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