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장 9절,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는 성경을 통틀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던진 최초의 질문이다. 하지만 이 물음은 아직도 메아리친다. 그에 답하지 않고, 들은척만척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원문대로라면 오직 한 단어, '아예카(אַיֶּכָּה)'에 지나지 않는 이 질문이 품은 전제와 의도까지 생각해 보기에, 이 짧은 말에 태인 무게는 엄청나다.
모순에 모순, 불합리와 역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왜 모순이며 불합리인가? 우선, 아담이 자신을 지으시고 에덴동산에 두신 창조주의 권위와 사랑을 저버린 데서 문제가 연원하였기 때문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여전히 교정되지 않은 사람의 그런 태도를 두고 선지자 이사야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을 이렇게 표현했다.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사 1:2~3)
소나 나귀도 아는 임자인데 사람은 자기를 짓고 양육하신 분을 모른다니 말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장에서 같은 요지의 변론을 펼친다. 사람이 창조주의 능력과 신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베풀어두신 모든 증거에도, 사람은 그분을 영화롭게 하거나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롬 1:19~21) 그러니 짐승도 주인을 알아보는 명백한 이치를 거스르는 인간의 성정은 세상에 만연한 가장 뿌리 깊은 모순이다.
하지만 이 창세기 3장의 메아리는 모순 그 자체인 상황에서도 배은망덕한 아담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것도 찾아서 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말이다. 사고를 쳤으면 그 당사자가 머리를 조아리고 도움을 구하는 것이 도리일 텐데, 오히려 문제아는 숨었고 하나님만 애타 하신다. 이 무슨 탈권위에 심지어 창조주의 수모인가? 이것은 또 하나의 불합리이자, 위계질서를 허무는 아이러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것 같았던 역설은 계속된다. 요한복음 1장에 와서 보니, 사람을 창조하신 말씀의 외사랑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 말씀은 빛이 되어 세상에 비치셨어도 거듭 무시되고 소박을 면치 못하셨다는 것이다.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 1:9~11)
이 모순의 절정은 심지어 일찍이 당신의 존재를 알리시면서 "너희는 내 백성, 나는 너희 하나님"(출 6:7) 하자고 언약까지 맺었던 백성마저 그 빛의 존재를 거절한 것이다. 빛으로 세상에 오시면서(was coming into the world, ESV) 각 사람에게 비치신 것이 성육신하신 임마누엘 사건 전에도 인류 전체에게 미친 계시라면, 이것은 응당 유대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마저 문전박대 당하신 것을 가리킨다. 거듭된 예언에 세례요한까지 동원하여 그의 오심을 준비하게 하였지만,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정작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쯤 되면, 세상을 향한 말씀의 외사랑이 끝장날 법도 하다. 그 사랑의 깊이는 이제 바닥을 드러내고, 다시 용서라고는 없는 냉기뿐인 빙하기가 시작될 성 싶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요한복음의 서론, 1~18절의 중심에는 불굴의 사랑이 있다. 모멸 찬 거절을 거듭 당하셨으면서도, 만에 하나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 베푸실 은혜를 약속하면서 말이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12~13)
모순의 모순은 결국 대역설을 낳는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 내용인즉슨 하나님의 외사랑은 절대 낭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침내 세상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 승리를 예견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는 은혜이면서도, 영접하는 당사자의 최소 의지와 동의 역시 필요하다. 우리에게도 자녀의 권세를 주시기를 갈망하시는 그분의 손길, 우리는 오늘 그분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모셔 들인 사람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