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고통의 그림자에서 빛을 보다.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by 카라마조프


거짓과 위선으로 얼룩진 삶의 마지막에서 매우 비참함을 보았다.


상류층이 된다는 것, 많은 재산을 가져서 사람들을 밟고 올라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이고 이러한 삶은 곧 이반 일리치의 인생이기도 했다.


예심판사라는 권력(누군가를 이곳에 불러다가 죄를 캐묻고 형량을 매길 수 있는), 연봉 오천 루블에 결혼하여 가정까지 꾸린 이반의 삶은 누구나 우러러 봤다.


하지만 인간은 내면이 언제나 보이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할 때가 많다.





'이반 일리치는 부유층이 애용하는 샤르메르 양복점에서 옷을 주문하고 '결과를 생각하라'라는 문구를 새겨 넣은 메달을 시곗줄에 걸었다.'


이반에게 품위란 목숨과 같았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면에 집착하며 속은 썩어 문드러져가고 있었지만.

그에게 자신의 가정은 피하고 싶은 대상이었고 모든 인간관계는 철저히 계산되었다.

여유에서 자연스레 드러나는 품위의 개념은 어렵사리 만들어가는 결과물로 탈바꿈했다.


신은 이러한 이반에게 벌을 내렸다.

평생토록 공들여왔던 품위를 깨뜨려버림으로써,

그리고 이반이 애써 외면하던 그의 시선을 현실로 마주 보게 했다.


그리고 신의 의도는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 상류층의 삶..

이반이 평생에 걸쳐 노력해 왔던 그의 인생과 결과물들의 덧없음을,

인생의 중대한 요점은 결코 그런 것들이 아니라 진실됨과 마음의 평화,

그리고 이들의 끝자락에 놓여있는 일상의 행복과 사랑, 평화임을 보여준다.


이 벌의 잔인한 점은

이반은 이 사실을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을 때 깨달았다는 것이다.

삶을 되돌릴 기회도, 공허했던 내면을 다시금 앞으로의 미래를 진정한 행복으로 채워나갈 기회도 없이

오직 후회의 눈물과 고통의 소리침 속에서 성찰만 할 뿐이었으니.


"산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산을 내려가고 있었구나. 그랬던 거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위로 올라가는 것 같았겠지만 그 세월 동안 삶은 나에게서 멀어져 간 거야.
이젠 다 끝났고 죽음뿐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나타나기 전, 이반의 가장 큰 행복이자 목표는 새 집을 사서 직접 꾸미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반에게 그 집은 단순한 거처 그 이상, 자신이 평생토록 좇던 품위와 귀족 같은 삶을 실현하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결국 허울뿐인 이반의 삶에서 이반은 스스로 만든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모르는 돌탑을 쌓다가 그 돌탑이 무너져 내리며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죽음 앞에서 품위는 귀찮게 걸리적거리는 존재로 전락했고 전부였던 집은 매일 갇혀있어 지겨운 존재로 여겨진다.


점점 자신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끼며 이반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원망을 쏟아내기도 하고 모든 게 의미 없음을 느끼며 허탈하기도 했다가

죽음 앞에서 살기 위해 조금이나마 발버둥 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마침내 죽음의 문턱까지 다가오자 깨닫게 된다.

돈, 명예, 품위는 죽음 앞에서 한없이 의미 없어짐을,

자신의 시중을 드는 게라심이 건네는 공감과 위로, 진실됨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걱정하는 '척'하며 자신들의 실속은 꼼꼼히 다 챙기는 역겨운 가족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꾸린 가정에선 언제나 거짓과 위선, 갈등만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이반은 마지막 순간, 스스로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래, 올바른 삶이 아니었어. 하지만 상관없어. 제대로 하면 되니까.
그런데 뭐가 올바른 거지?"


'올바른 삶'에 대한 정의는 주관적이기에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자신과 가족의 안녕이,

누군가는 물질적 풍요로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반의 삶을 통해 알 수 있는 공통된 올바른 삶의 한 가지 개념은

사람 대 사람과 맺는 모든 관계에서의 진실성과 사랑이 아닐까?




이반에게 죽음이란 그가 살아온 삶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죽기 직전, 이반은 평생에 걸쳐왔던 고통의 검은 그림자에서 진정한 빛을 보았고 비로소 품에서 해방되어 평화를 얻는다.

죽음을 통해 평화를 얻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이반은 모두에게 경고한다. 거짓과 위선이 아닌 솔직함과 이타적인 삶, 누군가를 인간적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삶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본질이자 가치라는 걸.

자신의 죽음을 통해 말하고 있다.



'해야 할 일을 다 했고 올바르게 해냈다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는 살아있는 자들을 향한 꾸지람과 경고도 담겨 있었다.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그 경고가 적절하지 않다고, 적어도 자신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가족과 주변 지인들은 애써 이반의 진정성이 담긴 경고를 외면한다.


그 고통의 소리침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자신에게 향할지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남편의 죽음으로 나오는 보험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카드게임,

예정된 새 가정.


그들은 이반이 그토록 경고했던 공허를 외면하고 드러나기만 하는 껍데기에 집착하는 모습을 끝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사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은 이반의 장례식 내용을 시작으로 생전 일생이 전개된다.


그렇기에 처음 책을 펼쳐 읽다 보면 참 묘한 장면들이 속속히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는 장례식장에서 이반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이 묘사되지 않는다.

오직 그의 막내아들만이 아버지의 죽음이 비통하다는 듯 슬픔에 잠겨 있을 뿐,

아내와 직장 동료들, 친구들까지 소름 돋을 정도로 자신들의 본심만을 조금씩 드러내는 모습을 보인다.


처음 이 장례식 장면은 기괴하고 불쾌하며 이반의 가족들과 지인들이 마냥 악인들처럼 보이지만.

모든 내용을 끝까지 읽고 다시 이 장면으로 되돌아오면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이반이 어떤 특출 난 사람이거나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비윤리적이라서 최후를 맞이했던 게 아니다.

단지 운 나쁘게 신의 본보기 응징의 대상이 되었거나, 혹은 재수 없게 죽음을 맞이했을 뿐.

그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 누구도 이반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자본주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톨스토이가 남긴 경고의 메시지를 보았다.

오직 경제적 자유만이 진정한 성공으로 여겨지며 보편화된 이 불쌍한 세상에선 이반 일리치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틀렸다고 보지 않은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반의 최후를 보았다.


이반의 후회와 그의 표정을 바라본 우리는 적어도 사람을 대하는 진정성과 관계 속 사랑의 뿌리가 없는 삶은 살지 않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8




*이 글은 AI를 일절 사용하지 않고 순수 작가의 생각을 직접 작성했습니다.*


커버 : 에드가 드가 - <압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