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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리뷰7)소재가 진부하더라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애비게일(2024) 리뷰

by 홍단
교훈 : 먹을 거 가지고 장난치는 거 아니다 조금 탈 날 수 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옛날이야기 한 토막. 옛날 아주 먼 옛날. 한 여행자가 어느 작은 나라로 흘러들어갔다가 친절한 집주인을 만나 하룻밤 묵게 되었다. 그런데 집주인이 선뜻 쇠고기를 대접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귀한 음식을..? 하며 궁금해하는 여행자에게 집주인은 '이 나라에는 어딜 가나 쇠고기가 넘쳐난다오'라 하며 소 한 마리를 보여준다. 그러더니 소의 궁둥이를 칼로 석 하고 잘라 내는 것이 아닌가. 여행자가 놀라 소리치는데, 주인도 소도 껄껄 웃고 있다. 다시 보니 소의 엉덩이에 살점이 돋아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소를 집집마다 기르는데, 매일 이렇게 궁둥이 살점을 잘라 줘야 한다오. 안 그러면 궁둥이가 커져서 소가 일어나질 못하게 되오"

소도 시원한지 아주 기분이 좋아 보인다. 여행자는 아주 부럽다고 생각했다. 먹을거리 걱정은 없겠군요 - 하고. 실제로 집주인 가족들은 아주 기름지다 못해 포동포동했다.

하지만 집주인 말로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다고 한다.


쇠고기도 하루이틀이지, 매일매일 소고기만 먹다 보니 이미 질릴 대로 질렸다는 것이다. 결국 밭이나 이런 데 옆에다 안 먹고 쌓아 둬서 방치되어 길거리에서 썩어가는 쇠고기가 부지기수라고.


"그럼 다른 나라에 판다던가,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까?"

"다른 나라에 넘기는 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오. 계속 먹고 또 먹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여행자는 이 나라를 떠나면서도 안타깝게 생각했다. 다른 방식으로 쓸 수 있는데, 쓰지 않아 결국 질려 버리다니. 어리석도다! 하고 말이다.


뜬금없이 왜 옛날이야기이냐 묻는다면, 오늘 이야기할 영화와도 어느 정도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애비게일'은 홀로 발레를 연습하는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아이를 노리는 일당이 있다. 서로 이름도 모르는 사이지만 목적은 단일하다. 바로 저 소녀 애비게일을 납치해 거금을 뜯어내는 것.


납치는 매우 순조로이 진행된다. 발레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를 납치해, 준비해 둔 별장에 데려오는 데도 성공한다. 별장은 그들을 고용한 이가 준비해 두었으며 여기서 24시간만 죽이면 돈을 뜯어낼 수 있다고 하니. 다들 쾌재를 부른다. 애비게일을 둘러싼 비밀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뭐, 포스터부터 숨기지를 않았다만... 애비게일은 뱀파이어였던 것이다! 그것도 발레를 하며 사냥감을 사냥하는. 순진한 눈물도 납치도 모두 거짓이었다. 의뢰조차 저 영악한 뱀파이어가 꾸민 짓이었으니. 저택은 순식간에 견고한 밀실로 변모한다.


총도 안 통해, 마늘도 안 통해. 십자가도 안 통해... 이제 납치극은 탈출극으로 변한다. 과연 납치범 일당은 이 저택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영화 포스터부터, 그리고 넷플릭스 영화 소개 화면부터 애비게일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문제는 뱀파이어는 이제 너무너무 많이 나온 사골 소재란 점이다.


뇌절!

물론 처음부터 뇌절은 아니었으니.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등장한 시절. '뱀파이어'라는 피의 화신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그 가공할 만한 존재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사람의 피를 빤다'라는 두려운 소재. 어둠 속에서 돌아다니며 인간을 사냥하는 괴물의 모습은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인 존재였으리라. 뱀파이어에게 물린 이들이 또 다른 뱀파이어가 되거나 예속된 노예가 되기도 한다는 것도 참으로 매력적인 소재였다.


뱀파이어가 책뿐 아니라 스크린에도 등장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하얗고 깡마른 '노스페라투'와 같은 뱀파이어의 모습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기 충분했다. 뱀파이어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충분히 - 그 시절까지는.


저번 '퍼스트 오멘' 리뷰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던 것 같다. 시대가 지나면서 뱀파이어 역시 이전의 위용을 그대로 유지하기는 어려워졌다. 뱀파이어 소재 영화가 해마다 몇십 트럭은 쏟아졌기에... 이제 어둠 속에서 누군가 피를 탐한다는 내용만으로는 더 이상 관객의 반응을 동일하게 불러낼 수 없었던 탓이다. 그 맛있는 쇠고기도 매일매일 구워 먹으면 질리기 마련이니까.

'무섭기보단 몸이 불편해 보인다'라는 리뷰도 있더라 아무래도 이미지만으로 먹고살던 시절은 지나가긴 했죠

뱀파이어 영화는 이에 여러 가지 방향으로 선회해 나간다. 뱀파이어라는 소재에서 전염성과 불사성 등 일부 요소만 차용한 좀비 영화의 등장이라던지. 뱀파이어를 주인공으로 스타일리시한 액션을 보여주는 '언더월드' 시리즈라던가. 아예 그 유명한 '트와일라잇' 시리즈처럼 공포 집어던지고 아예 연애의 대상으로 노선을 튼 사례도 있다. 그 외 하이틴 판타지물인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 시리즈나 '트루 블러드', '뱀파이어 다이어리' 등등... 뱀파이어 장르는 아주 다양한 활로를 모색해 나갔다.


마치 매일매일 소고기를 먹으면 질리니까, 다른 곳에 고기 판매를 한다던지. 가죽으로 공예를 한다던지. 하는 식으로 다양한 활로를 모색하듯 말이다.


그리고 개중에서는 공포 대신 '코미디' 요소를 강하게 부각하여 두각을 드러 낸 작품들도 있었으니.


오늘 리뷰할 영화인 '애비게일'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크게 한탕 벌이기 위해 모인 5명. 다들 캐릭터성이 뚜렷하다 못해 전형적이다. 아마 공포영화 좀 본 사람이면 죽는 순서도 짐작 가능하리라 싶을 정도다. 여기에 애비게일이라는 뱀파이어가 한 스푼 더해진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주 전형적인 뱀파이어물이겠으나. 영화는 '순진한 척하며 사냥감 농락하는 불사신 발레리나 뱀파이어'라는 독특함을 한 스푼 더 첨가한다. 덕분에 영화 내내 애비게일이 발레를 하며 희생자를 공략하는 꼴을 볼 수 있다. 발레 하느라 아주 유연한데 힘도 세고 약점도 햇빛 정도 제외하면 없다시피 하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재미는 이런 독특함을 유머로 승화시킨다는 점이다. 뱀파이어란 소재를 진지하게 끌고 가, 쫄깃쫄깃하게 만드는 건 예저녁에 포기했다. 어차피 뱀파이어가 날고긴다고 무서운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다. 대신 아주 웃기는 뱀파이어. 웃기는 상황을 연출한다.


덕분에 마늘 들고 공략하려 했다가 뱀파이어가 마늘냄새 대놓고 흡입하고(봉다리째로) 십자가 빼앗아서 사람 구멍투성이 만드는 걸 낄낄거리며 구경할 수 있다. 그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농담 따먹기 하는 건 덤이다. 양파랑 마늘 구분 못해서 혼나질 않나. 시쳇물에 빠졌다 돌아왔는데 냄새난다고 디스 당하질 않나...


거기다 뱀파이어는 희생자를 쫓는 상황에서조차 발레를 고수하신다. 어찌나 충실한지 막판에 위기상황이 닥칠 때조차 춤을 추신다. 발레리나란 컨셉에 지극히 충실한 뱀파이어의 모습은 이 영화가 진지함은 애저녁에 날려버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덕분에 관객들은 피분수쇼가 펼쳐지는 상황에서조차 가볍게 웃으며 감상하게 된다. 과장이 아니라 피가 정말 폭죽처럼 터져서 등장인물들이 피칠갑을 하고 다니는데도 진지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가볍고 즐겁게. 다음에 어떻게 될까 스트레스 따위 없이 감상 가능하다. 맨 마지막 살아남은 주인공이 피칠갑한 상태로 사탕을 빠는데 끝내주게 맛있어 보인다 - 하는 감상만 남을 정도.


쇠고기가 지천에 있다면. 첫 입맛에야 맛있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계속 쇠고기 요리만 먹는다면 어떻겠는가. 아주 질리다 못해 또 쇠고기냐? 하고 볼멘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뱀파이어 영화도 비슷하다. 쇠고기는 뱀파이어란 소재다. 이걸로 요리를 해 봤자(뱀파이어란 소재를 우직하게 밀고 나가봤자) 또 쇠고기야? 소리만 나오기 마련. 하지만 이 여분을 판매해서 다른 음식을 산다면 어떨까? 아님 가죽만 긁어내서 지갑을 만든다던지 하면 어떨까. 뱀파이어란 소재는 엑기스만 남기고 코미디에 집중한 이 영화가 바로 좋은 예시라 볼 수 있겠다.


소재가 진부하면 어떠랴! 옛날 어느 작은 나라면 몰라도 지금은 21세기다. 어떤 방식으로든 돌파구는 있기 마련이다.


총평 : 쓸데없이 진지하느니 유쾌함에 집중한 영화. 가볍게 보기 딱 좋은 영화다.


P.s. 감독의 전작 '레디 오어 낫'에서도 마지막에 피분수쇼를 감상 가능하다. 여기서도 생존한 주인공 여자가 피칠갑을 한 채 담배를 끝내주게 맛있게 먹는데... '애비게일'에선 사탕으로만 바뀌었지 거의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감독 취향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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