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아파트와 고층건물 사이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과 성벽은 너무나 어색한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이제 그들은 그저 역사책 속에 나오는 장소 중 하나일 뿐이거나 가끔 성벽을 따라 걷는 산책길 정도로만 인식될 뿐 성의 본래 역할이였던 방어는 이미 잊혀진지 오래이다.
관광지를 가면 어쩌다 보게 되는 성과 성벽은 늘 추천관광 코스에 들어가있지만 대부분이 그저 성벽을 따라걸으며 풍경 감상을 할 뿐이고 몇몇은 이게 왜 추천 관광 코스인지 의문을 갖기도 한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성과 성벽의 본래 역할인 방어에 쓰인 여러 가지 원리와 구조들을 알아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앞으로 성과 성벽을 보게 되었을 때 숨겨진 의도와 전략을 파악하는 나름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성과 성벽의 주 목적은 당연하게도 방어이다. 그렇다면 효율적인 방어를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 일반적으로 성을 지을 때는 효율적인 방어를 위해 크게 인원 분산, 사각지대 해결에 목표를 둔다.
이 글에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방어 구조들을 인원 분산, 시야, 그리고기타 방어시설들로 나누어서 살펴보겠다.
우선, 인원분산의 목적이다. 우리가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구조는 길이 구불구불하게 미로처럼 꺾여져있는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는 성에 공격을 할 수 있는 적의 인원수를 제한하여서 적이 가용할 수 있는 병력에 비해 성에 가할 수 있는 공격을 크게 제한한다.
방어하는 쪽 입장에서는 한 번에 큰 공격을 받아내기보다 제파식으로 여러번에 걸쳐서 나누어받아내는 것으로 더욱 효율적인 방어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제파식으로 공격을 받아내는 것이 앞으로 보게 될 인원분산 구조들의 주된 목적이다.
다음으로 꽤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다중성벽이다. 다중성벽 역시 역할은 비슷하다. 성벽을 여러겹으로 나누어서 바깥쪽이 뚫리더라도 안에서 막아낼 수 있고, 성벽과 성벽 사이에 간격을 조절하여 한 번에 들어올 수 있는 적의 병력을 제한하여 적의 공격력을 감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각 성벽들의 높이를 뒤로 갈수록 높게 만들어서 방어자들 간의 협공과 단계적 방어에도 유용하게 설계한다. 초기에는 그저 이중성벽 정도였지만 나중에는 3겹, 4겹까지도 등장한다.
이번엔 우리에게 수원화성으로 비교적 익숙한 옹성이다. 다중성벽은 성벽을 한 겹 더 쌓는 것이고 옹성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문 밖을 둘러싼 또다른 작은 성이라는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옹성이라고 불리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러한 구조는 흔하게 볼 수 있다.
옹성은 본 성의 성문을 한 번 더 보호해줄 뿐만 아니라 적이 옹성을 돌파하였을 때도 본 성의 인원과 옹성을 방어하던 인원이 함께 옹성 안으로 들어온 적을 공격하는 역할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옹성은 본 성보다 살짝 낮은 높이로 짓는데 이는 혹여나 옹성을 적이 점령하였을 때 고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함이다.
이제 사각지대를 방지하기 위한 구조들을 알아보겠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사각모양으로성을 만든다면 당연하게도 모서리쪽에 사각이 생긴다.
그리고 성은 입체이기 때문에 인간의 시야 특성상 성의 바로 아래에도 사각이 생긴다. 특히나 우리가 성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구조물인 성벽 위에 돌기처럼 나있는 여장(女牆)은 이러한 사각을 더욱 심화시킨다. 이러한 사각지대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부터 사람들은 여러 구조들을 시도했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해결책은 치(雉)이다. 치는 성곽의 일부를 돌출시킨 형태로 주로 사각지대나 방어 취약 지점에 설치한다. 이렇게 성곽의 일부를 돌출시킨 형태를 취하여 옆쪽 성곽의 사각지대인 성곽 바로 아래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치를 하나만 설치한다면 돌출부인 치성에 대한 방어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나 치를 여러개 설치한다면 여러 면에서 적을 협공할 수 있게 되고 각 치의 사각지대를 본 성곽과 치들 간의 협공으로 해결이 가능해진다. 치는 만들기도 비교적 간단했고 효과 또한 뛰어났기에 고대부터 사용되던 구조였다.
치를 통해서 모서리의 사각은 제거가 가능했지만 성벽 바로 아래의 사각은 몇가지 해결책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성벽에 덧붙여진 형태인 호딩과 현루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형태의 구조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등장했는데 서양에서는 호딩, 중국에서는 현루, 일본에서는 이시오토시라고 불렀다.(한국에도 성벽에 설치하는 형식의 성랑과 같은 구조물이 있긴 하였으나 이는 앞서 나열한 예시들처럼 성벽 아래 사각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이는 토성, 산성 위주의 축성 환경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다음에 자세히 다루겠다)
이러한 형태의 구조물들은 직접적으로 성벽 바로 아래의 사각을 해결해주었다. 그러나 보다시피 대부분이영구적이라기보다는 기존에 지어져있는 성벽에 덧씌우는 형태여서 번거롭기도 했고 내구성에도 문제가 있었다.
건축 기술이 발달하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양에서는 마시쿨리를 도입했다. 마시쿨리는 기존의 호딩과 역할은 유사하지만 돌로 만들어져서 내구성이 좋았으며 적의 화공에도 견딜 수 있었다. 호딩처럼 따로 설치하고 보수해야하는 번거로움도 훨씬 줄어들었다.
서양에서는 석회를 통한 모르타르와 이를 사용한 석조 건축의 기술이 발달하여 이러한 마시쿨리가 널리 퍼졌지만 동양에서는 기술, 재료, 시대적인 배경 등 여러 이유로 인해 다른 방법을 사용하였다.(이에 대해서는 서양과 동양의 지질학적 이유,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기, 기술적 한계 등 여러 이유가 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다루어보겠다)
동양에서 주로 선택한 방식은 현안이였다. 현안은 여장의 아랫 부분에 파인 모양으로 가공한 돌을 사용하여 성벽 아래의 사각을 해결했다. 돌이나 벽돌을 파인 모양으로 가공하여 여장의 아랫 부분에 사용한 뒤 여장 뒤에 숨어서 현안을 통해 성벽 아래의 시야를 확보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만든 현안은 현루에 비해 더욱 내구성이 좋고 교체 또한 용이하다는 이점이 있었으나 서양의 마시쿨리와는 다르게 하부의 사각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는 단점도 존재했다.(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비교적 공성전의 기회가 적었고 평화기가 길었기에 단점을 크게 체감하지 못하였고 실제로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앞서 말한 구조들은 모두 방어자가 사각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한 구조들이였다. 그러나 방어자 입장에서도유리한 시야각을 만들어서 방어에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구조물이 바로 에로우슬릿(arrowslit)이다. 에로우슬릿은 안쪽에서 바깥쪽까지 삼각형 형태로 구멍을 내어서 안쪽에서 방어할 때는 바깥이 잘 보이게, 바깥에서 공격할 때는 안이 잘 보이지 않게 설계하였다.
이러한 시야적인 이점뿐만 아니라 공간 대비 넓은 시야를 확보하여 방어자가 더 안전하게 방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름은 에로우슬릿이지만 이러한 구조는 화약무기의 등장 이후로도 활이 아닌 총을 쏘는 구멍으로 여전히 활약하였다.
이제 나머지 다양한 방어구조 중 대표적인 2개를 살펴보겠다. 먼저 알아볼 것은 우리에게 여러 미디어의 영향으로 익숙한 해자이다.
해자는 성벽 주위에 구덩이를 파고 물을 채워넣은 것으로 진주성처럼 처음부터 강이나 하천을 끼고 지어서천연 해자의 역할을 하게 만든 경우도 꽤 있다. 해자는 만들기에 까다롭고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만큼 성벽 방어에 있어서는 최고의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일단 해자를 만들게 되면 적이 애초에 성벽에 접근 자체를 어려워하는 경우가 태반이고 혹여나 성벽에 접근하게 되더라도 공격자의 입장에서는 해자에서 성벽을 올려다볼 때 체감되는 높이가 해자의 깊이에 성벽의 높이를 합친 높이가 되므로 성벽에 접근했다고 하더라도 공격을 하기에 매우 주저하게 된다.
그리고 공격을 시작하게 되더라도 성벽을 공략할 때 고전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땅굴을 통한 공격이 완전히차단되거나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까지 난이도가올라가기 때문에 공격자는 가뜩이나 불리한 입장에서 완전히 정공법으로만 성을 공략해야한다.
해자는 물로 인해 적이 특정 공간을 아예 사용하지 못하게 한 채 물리적인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화약무기를 통한 공성전이 본격화되고 나서도 꽤나 오래 유지되었다.
마지막으로 알아볼 것은 살인공(殺人孔)이다. (수원화성에도 비슷한 구조인 오성지가 있긴 하지만 주목적이 화재 진압이기 때문에 수세적 성향을 갖는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영어로 murder hole이라고 부른다)
살인공은 바깥 성문과 안쪽 성문 사이 공간의 천장에 구멍을 뚫은 구조로 이 구멍을 통하여 뜨거운 물이나 화살, 돌 등을 투척하여 성문으로 들어오는 적을 위에서 공격하기위한 구조이다. 주로 공격자가 성벽을 돌파한 후 성에 진입을 시도할 때 이를 저지하는 목적으로 활용했다.
지금까지 축성술에서 가장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구조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렇게 다양한 방어 구조들을 살펴보고 나니 왜 많은 역사책에서 공격할 땐 최소한 방어하는 병력의 3배가 필요하다고 하는지 어느정도 이해가 되지 않는가?
이번 글에서 다룬 구조들은 아주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형태의 구조들에 불과하다.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보면 동서양의 차이, 동양과 서양에서도 서로 여러 사회, 문화, 역사, 환경적인 다양한 이유로 차이가 나타나는 가지각색의 구조물들이 존재한다.
분량과 글 전개상의 문제로 다양한 구조물들과 각 지역별 배경과 차이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자세히 파헤쳐보도록 하겠다.
이 글을 통하여 다음에 성을 볼 때 성의 여러 방어시설을 관찰하고 숨겨진 의도를 파악해보는 재미를 느낄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반 이상 성공한 글이라고 자평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