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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보는 글쓰기

말, 바람에 실려 어디로 가는가?

by 수련 Mar 17. 2025

외로움을 많이 타던 이십 대 초반, 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취업했다. 대학생인 남동생은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주말에 만나 밥을 같이 먹곤 했다. 낯선 서울에서 자취하면서 집이 그리웠다. 일과를 마치면 콩나물전철을 타고 불빛이 없는 집으로 들어가는 일이 쓸쓸하고 외로웠다. 습관적으로 집 근처 놀이터 앞 공중전화를 본다. 어쩌다 줄이 짧은 날이면 얼른 뛰어갔다. 동전이 몇 개 있는지 주머니를 확인하면서 줄을 섰다.      


공중전화는 3분 단위로 요금을 계산했다. 상대가 전화를 받으면, 동전이 전화기 내부의 돈통으로 떨어지면서 통화가 시작되었다. 3분이 끝나갈 때면 뚜 뚜뚜 알림이 울렸다. 통화를 계속하려면 동전을 더 넣으라는 메시지인데, 제때 돈을 넣지 않으면 어김없이 통화가 끊겼다. 하지 못한 말이 입안에 맴돌았다.      


가을이 시작되던 일요일이었다. 나는 동전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 공휴일에는 공중전화의 줄이 짧았다. 시골집에 전화하여 엄마와 느긋하게 통화하고 싶었다. 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전화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줄 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아주머니의 뒤에 섰다. 건물 기둥에 전화기가 달려 있을 뿐, 부스가 따로 없던 때였다. 들을 의도가 없어도 통화 내용이 대부분 들렸다.      


아주머니는 타지에 사는 딸과 걱정을 나누고 있었다. 아주머니의 남편이 병원 치료를 받게 되어 돈을 마련해야 했다. 아들은 다른 일로 속을 썩이는 모양이었다. 힘들고 다급한 사연을 전하면서도 아주머니는 감정이 절제되어 있었다. 하루 이틀 겪는 어려움이 아닌 듯했다. 남의 곤궁한 사정을 계속 듣기가 거북해서 조금 뒤로 물러섰다. 길가 모퉁이의 흔들리는 분홍 코스코스에 시선을 돌렸지만, 통화 내용은 여전히 들렸다. 아픈 남편과 사고 친 아들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러다 통화가 끊길 시간이 다가왔다. 뚜 뚜뚜 알림을 들으며, 아주머닌 서둘러 딸에게 말했다. 


“너 반찬은 있니?”

하지만 이미 동전이 마지막 시간을 다한 때였다. 아주머니가 뒤늦게 챙긴 안부는 전해지지 못했다. 아주머니는 아쉬워하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주머니는 한두 걸음 옮기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전화기가 딸의 얼굴인 양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편과 아들 때문에 뒷전으로 밀린 딸에게 미안했던 걸까,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 하지 못한 말 사이에서 눈길이 떠돌았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한 다부진 모습, 삶의 고단함으로 무거운 짐을 진 듯 조금 수그러진 어깨. 흰머리가 듬성듬성 섞인 윤기 없는 단발머리, 평범한 모습 사이로 건조하고 말 없는 슬픔이 내게 스며들었다. 슬픔에도 연륜이 있다는 걸 그때 느꼈다.      


무거운 삶은, 길 위에 흩어지는 바람 같다. 때로는 조용히 스며들고, 때로는 모질게 부딪치며 지나간다. 바람처럼 흘러가는 말들도 그렇다. 전하고 싶지만 하지 못 하는 말, 입가에서 맴돌다 사라지는 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마음속 어둠에 스며드는 말.     


나는 주머니 속 동전을 만지작거렸다. 아주머니에게 내 동전을 건네야 할까. 하지만 나도 엄마 목소리가 필요했다.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타향살이의 무게를 내려놓고 싶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아주머니가 걸음을 돌릴 때까지 기다렸다.     


말은 어디로 가는가. 하지 못한 말들은, 허공을 돌고 돌아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면 가슴속 깊이 스며들어 단단한 돌처럼 굳어지는 걸까. 말이란, 한 번 흘려보내면 되돌릴 수 없는 물줄기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주머니는 골목길을 따라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동안 쌓아둔 말을 쏟아냈다. 별것 아닌 일상의 하소연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우리는 말로 서로를 지탱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 못한 말들이 바람처럼 흩어지지 않도록,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이는 일.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전하지 못한 말들을 위해.

더울 때 그늘이 되어 줄 말,

어둠 속에서 빛이 되는 말,

굳은 마음을 열어주는 말.

삶이 힘겨울 때, 가만히 등을 다독여 주는 말.

그런 말들로, 따뜻한 집을 짓고 싶다.

그 안에서 편안히 숨 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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