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감각 자극 글쓰기 -그리움
경기 문화의 전당 제2공연장. 아담한 무대 앞에 객석은 잔잔한 숨을 고르며 공연 직전의 떨림을 공유하고 있었다. 약 백석 남짓한 홀에는 은은한 조명을 받은 원목 무대는 나뭇결을 따라 부드러운 빛을 내어주고 정갈한 음향 시설은 곧 시작될 작은 공연을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날, 첫눈처럼 조용히 등장한 작은 피아니스트는 하이 포니테일 끝에 핑크 리본을 달고, 청록색 울 실크 원피스는 조명을 받아 촉촉하게 반짝였다. 생애 첫 무대 화장을 한 아이의 뺨은 설렘과 긴장으로 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의자 아래의 작은 발은 페달에 올라앉는 순간, 객석의 공기마저 함께 긴장했다. 손끝이 건반 위에 닿자, 소리는, 별빛이 번지는 듯 객석으로 퍼져나갔다.
맑게 빛나는 구슬 같기도 하고, 겨울 새벽의 찬 공기를 스치는 바람처럼 객석으로 서서히 번져갔다. 삼 년 동안 바이엘에서 체르니 30번까지, 작았던 손가락은 꾸준한 연습으로 단단한 울림을 갖게 되었다. 학교가 끝나면 피아노 학원으로 향하고, 하루 두 시간씩 연습을 매진하는 시간은 밭에 씨를 뿌리듯 묵묵하게 쌓여 무대 위에서 꽃을 피우는 순간이다.
연말마다 열리는 학원 연주회는 그해 처음으로 우리 가족에게 작은 축제가 되었다. 우리는 백화점에서 고른 '오월의 청보리'를 닮은 원피스, 부드러운 레이스 스타킹과 발끝이 또렷하게 보이는 빨간 구두까지 준비하여 한 송이 꽃을 무대에 올리는 마음으로 이 무대를 기다렸다. 지금은 ‘경기아트센터’라 불리지만, 내게는 여전히 그 시절 문화의 전당으로 기억된다.
하얀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은 아이는 조용히 숨을 고르더니, 연습했던 곡의 첫 음을 눌렀다.
“베토벤, 엘리제를 위하여.”
'따라 따라 따~랄라 따라라 따~라라….' 수없이 맞춰본 페달 타이밍, 반복해서 다듬은 선율, 음표마다 불어넣은 감정이 그 작은 손끝에서 맑게 흘러나왔다. 귀에 익숙한 멜로디는 공기 속에서 반짝이며 흐르고, 그 음표는 작은 새의 날갯짓처럼 객석의 어둠을 스치고 날아갔다가 마지막엔 부드럽게 사그라 졌다.
곡을 마친 뒤 아이가 일어나 인사하자, 무대의 핀 조명이 그녀의 몸짓을 따뜻하게 감쌌다. 평소 내성적인 아이는 그 순간만큼은 무대라는 작은 우주를 환히 밝히는 주인공이었다. 초등부 우수상, 꽃다발 향기, 반짝이던 트로피, 플래시 속의 미소. 그날의 장면은 오래된 필름처럼 지금도 마음속에서 느릿한 온기로 남아있다.
연주회를 마친 우리는 문화의 전당 별관에 있는 레스토랑 ‘아데네’로 향했다. 회색의 고풍스러운 외관, 오렌지 빛 따뜻한 조명 아래의 실내, 그리고 가족을 맞이하던 격조 있는 분위기. 버터향이 은은하고 부드러운 크림수프는 숟가락 끝에서부터 혀를 감싸며 사르르 넘어가고, 생애 첫 에스카르고(달팽이요리)는 진하고 고소한 생크림에 잠겨 낯설지만 매혹적인 트러플향을 뿜었다. 우리가 먹는 뿔소라 요리보다 부드럽고 녹진한 맛이었다. 필레미뇽(송아지안심)은 연한 육향이 블랙후추와 올리브향이 입안에서 조용히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손녀의 재롱을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 짓던 부모님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디저트로 나온 적갈색의 티라미수는 초콜릿향과 살짝 감도는 계피 향은, 하루의 달콤함을 마지막 한 조각가지 완성해 주었다.
그 아이는 어느새 마흔을 바라본다. 그럼에도 그날 건반 위에서 춤추던 리듬은 우리 가족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생생하다. 중학교 이후 공부에 집중하느라 피아노 연주가 뜸해졌어도, 가족이 모이면 거실의 피아노 뚜껑은 언제나 천천히 열린다.
“크시코스 우편마차.” 따라 따라 따라라 ~따랑 따라…. 우편 마차를 이끄는 말이 질주한다고 상상하며 들으면 경쾌한 리듬이 기분 좋게 한다.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당당당당 딴딴딴 딴따다 딴다나…. 중. 고등학교 시절 점심시간에 틀어주던 익숙한 곡이다.
“엘리제를 위하여.”미레미레 미시레 도랄라 …. 빗방울이 연주하듯이 애잔하면서도, 수백 번을 들어도 아름다운 멜로디이다.
초등 시절 거실에서 연습하며 흘러나오던 따뜻한 공기, 연습 중 멈추어 선 음표들, 이 익숙한 곡들은 기억의 서랍 속에 고스란히 줄지어 있다. 그 시절 음악적 기초는 지금도 딸과 아들의 삶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되어 준다. 작은 손가락을 쫙 벌려 손을 풀어주고 건반을 잡던 모습, 땀과 설렘이 섞이던 겨울의 공기, 첫 연주회를 준비하던 온 가족의 마음. 첫 무대의 조명이 아이의 볼을 물들이던 빛의 온도, 그 감각들이 시간이 바래도 스러지지 않은 채, 우리 마음속에서 여전히 부드럽게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