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정윤-제6강, 간결하게 글쓰기 (엄마)
엄마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비교적 젊으실 때 그것도 시골 생활을 하시던 때와 서울로 오셔서 인생 말년을 보내신 것이 확연히 대비된다. 전자의 쓰고 신산한 나의 기억은 아래 동생들의 기억과 아주 다르다. 서로 기억의 편린이 달라서 부모님과 친정살이에 대한 본인들의 견해를 각자 유리한 대로 주장하며 기억 다툼을 할 때가 있다.
나는 여섯 자매의 둘째다. 나의 아버지는 시골 종가의 칠 남매 중 장남이었지만 할아버지 밑에서 농사일을 거드는 것으로 생활이 이루어져 결혼생활도 자립이 안 된 상태의 일상이었다. 강성인 부모님께 감당 안 되는 아버지, 순종만 하며 자기주장을 펴지 못하는 엄마는 딸만 여섯이었다. 거기에 삼촌들마저 결혼 무렵 시골집으로 찾아들어 자립을 위해 머물면서 정작 당신들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노총각이던 셋째 삼촌이 결혼했다. 시골집에 찾아들어 농사했으나 그것으로 대책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면사무소에 공채되어 1년 만에 장가를 든 것이다. 차례로 분가하면 됐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장가를 들어도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다. 장가든 셋째 작은아버지와 넷째도 결혼하지 않은 숙모와 아이까지 하나 딸린 채 모두가 한집에 사니 우리 형제는 보이지도 않았다. 살살거리는 사실혼 며느리 덕에 능력 없는 아버지와 얌전하기만 하고 자기주장을 하지 못하는 엄마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어려워져 갔다.
1977년은 내 인생에 각별한 의미가 있는 해이다. 시골집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하던 엄마와 아빠는 홀홀히 밤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신 후 다섯인 딸들이 조부모 밑에 남겨졌다. 불편하고도 부자연스러운 현상의 시작이었다. 같이 있어도 도움이 별로 되지 않은 상황이긴 했다. 그 후 내가 다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고 그렇게 했다. 남겨진 자식과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당신들도 살기 바빴다는 변명으로 그와 관련하여 생전에 한마디 언급이 없으셨다.
우리 자매들은 부모가 부재인 채 조부모 밑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것도 작은아버지들이 살림을 전담하는 상태에서 생존전략은 어른들의 말을 무조건 따르고 순종하는 길밖에 없었다. 물론 부모님이 시골에 계셨을 때도 자신들의 무게도 감당하기도 어려웠었다. 어린 자식들을 감싸고 의견을 들어주고 돌봐줄 여건이 되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실세인 할머니에게 잘 보이는 법을 각자 터득해야 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남편을 만나기 전, ‘행복하다’라고 느꼈던 때가 없었다. 늘 버거웠다. 용맹정진이었다. 불교에서 ‘용맹정진’이라는 수련이 있는데 ‘힘겹고 아파서 더 이상 올릴 수 없는 다른 발을 들어 왼발 앞에 놓고,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왼발을 들어 오른발 앞에 놓는 것.’ 그 한 발, 한 발, 그게 내 시간이었다.
엄마는 서울에 사시면서 일 년에 열 번이 넘는 기제사를 위해 오르내리셨다. 그 시대 며느리의 숙명이었으나 성당 연미사로 모시게 된 지금 생각해보면 많은 희생과 노고가 필요한 행위였다.
제사를 극진히 모셔서 그랬는지 아니면 딸들이 자립심이 강해서 그랬는지 아버지의 서울 생활은 조금씩 나아지고 경제적으로도 자립이 되어갔다. 네명의 어린 동생들은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내가 뒷바라지를 감당했다. 고등학교까지 시골에서 마치고, 차례로 서울로 올라와 나머지 공부를 마쳤다. 그녀들은 결혼하여 친정 집 근처에 살면서 화목하게 지내게 된 것이 가장 잘한 일이었다. 자녀들이 차례대로 결혼하고 사위들이 들어오고부터는 아빠 편이 급속히 늘어났다. 장인어른 편이었다. 지지도 면에서 나름 주도적이던 엄마는 다분히 내려놓는 편안함이었고 아버지는 그에 걸맞게 술을 드시는 날도 줄어들었다.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딸들은 때마다 모여 부모님과 식사를 같이하고 주말마다 번갈아 가며 모시고 여행을 다녔다. 우리 신랑이 단연 탑이었다. 친정 자립의 과정에서 우리 부부의 역할이 지대한 마중물이었던 게 사실이다. 엄마가 일생을 잘 버텨준 덕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잘한 일은 두 분이 성당을 나가시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신앙의 형식적 외향을 즐기셨고, 주일이면 제일 좋은 옷으로 챙겨입고 제일 먼저 성당에 도착하셔서 신부님과도 사이가 좋으셨다. 딸들의 교우들과도 잘 어울리셨다. 그들의 눈에는 능력 있고 자상하며 사람 좋은 부모님이었다. 진정으로 행복해하셨다,
무엇보다 압권은 두 분 모두 나이가 드셔서 돌아가실 때 요양원에 가지 않아도 됐다. 우리 부부가 마련해드린 집에서 평생을 사시고 그 집에서 운명하셨다. 거기에는 언니의 구심점 역할이 큰 힘을 발휘했고 동생들 또한 묵묵히 언니를 따르는 수고가 있었다. 사위들도 전심전력이었다. 이는 보기가 드문 사례가 되었다. 인생 전화위복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시골살이를 마무리하지 못했다면 감히 바랄수도 없는 노년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을 조금 뒤집으면 엄마 관점에서 이 글을 써나갈 수 있을 테지만 아직 그런 배려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글을 쓰면서 나 자신과 화해해야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