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문제는 구조다

by 별이온

나는 왜 이 질문을 시작했는가

어느 날, 오래된 질문 하나가 다시 떠올랐다.


냉장고 문을 세 번 열었다.


아침에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
먹고 싶은 게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무엇을 먹어야 할지 몰랐다.


10분 후 다시 열었다. 역시 닫았다.
30분이 지나 세 번째로 문을 열었을 때서야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냉장고 안에 있는 게 바뀐 것도 아닌데, 왜 나는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걸까.’


냉장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내 안에 ‘지금 뭐가 필요한지’를 묻는 기준이 없었던 것이다.
배가 고픈 건지, 심심한 건지, 무언가 채우고 싶은 건지.
그 구별이 없으니 행동만 반복됐다.


그날 나는 작은 메모를 남겼다.


'기준이 없으면 행동은 반복된다.

냉장고 앞에서도, 인생의 큰 선택 앞에서도.'


사소한 발견이었다.
하지만 이 한 줄이 내 삶 곳곳에서 메아리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20년 동안 반복된 회의

나는 20년 가까이 비영리 단체를 운영했다.
매주 회의를 했고, 매년 계획을 세웠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했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 묘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작년 회의록을 꺼내 읽으면 올해 회의와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같은 문제, 같은 논쟁, 같은 결론.
해결됐다고 했는데, 돌아오면 또 같은 자리에 있었다.


“왜 이 문제는 매번 반복될까.”

“왜 분명히 노력했는데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까.”

“왜 좋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조직은 자꾸 흔들릴까.”


처음에는 사람 탓을 했다.
저 사람이 바뀌면 될 텐데, 저 사람만 없으면 될 텐데.
그런데 사람이 바뀌어도 비슷한 문제가 다시 나왔다.
다른 사람, 같은 패턴.


한 번은 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이 갑자기 떠났다.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을 데려왔다.
그런데 6개월 후, 회의실에서 나오는 말들은 놀랍도록 비슷했다.
새로운 얼굴, 같은 대화.


그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사람이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방향을 바꿔 봤다.
사람이 아니라 구조로.


그리고 보이기 시작했다.
정보가 흐르는 방식, 결정이 이뤄지는 방식, 문제를 나누는 문화.
이것들이 매번 같은 결과를 만들고 있었다.


현장에서 몸으로 배운 것

조직 일을 잠시 내려놓고, 지게차 기사로 현장에서 일한 시간이 있었다. 18개월.
처음에는 낯선 환경이 불편했다.
몸이 익숙하지 않은 동작을 반복해야 했고, 작은 실수 하나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오히려 그곳에서 가장 선명한 것들을 배웠다.


현장에는 흐름이 있었다.
어디에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 어떤 순서로 움직여야 하는지,
사고가 나지 않으려면 무엇을 먼저 확인해야 하는지.


이 흐름이 잘 짜인 현장은 조용했다.
소리가 작았다. 빠르고 안전하게 돌아갔다.

반대로 흐름이 엉킨 현장은 달랐다.
늘 시끄러웠다. 누군가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이 잘못 놓이거나, 작업이 멈췄다.
재미있는 건, 그 원인이 대부분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달라도 잘 짜인 현장에서는 누구든 잘 움직였다.
반대로 흐름이 엉킨 현장에서는 베테랑도 실수를 했다.
베테랑이 더 조심하고 더 잘 해낼 수 있었지만, 엉킨 구조 안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잘 만들어진 흐름 안에 서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잘 움직인다.
구조가 행동을 만든다.


나는 그 18개월 동안 몸으로 배웠다.
머리로 아는 것과 온몸으로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
구조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지게차를 몰면서 비로소 완전히 이해했다.


누군가 던진 한마디가

누군가 내게 말했다.


“당신은 구조를 보는 사람입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리고 기묘하게 울렸다.


냉장고 앞에서 느꼈던 것, 20년 조직에서 반복됐던 것,
현장에서 몸으로 배운 것.
그 모든 경험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늦은 나이에 ISO 경영 시스템 공부를 시작했다.
자격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평생 느껴왔던 것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과 나누기 위해서였다.

ISO 심사는 쉽게 말하면 ‘조직을 들여다보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 방법의 핵심에는 이런 질문들이 있었다.


“이 조직은 기준을 세우고, 그대로 움직이고 있는가?”

“문제가 생겼을 때, 원인을 구조에서 찾는가?”

“그리고 그 구조를 스스로 고쳐가고 있는가?”


이 질문들을 처음 읽었을 때 손이 멈췄다.
회사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 삶, 내 관계, 내 선택의 순간들에 그대로 겹쳐졌다.


냉장고 앞에서의 그 느낌.
20년 조직에서의 반복.
현장에서 몸으로 배운 것.
누군가가 나에게 던진 한마디가
모두 같은 이야기였다.


구조가 없으면 행동은 반복된다.
구조가 바뀌면 삶이 바뀐다.


이 글을 쓰는 이유

이 글은 전문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매일 반복되는 문제 앞에서 지쳐가는 사람들,
열심히 살고 있는데 왜 달라지지 않는지 모르겠는 사람들,
관계와 일과 선택 앞에서 자꾸 흔들리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


어려운 개념은 없다.
ISO가 무엇인지 몰라도 된다.
심사가 무엇인지 몰라도 된다.


다만 이 글을 읽으며,
자신의 삶을 구조로 바라보는 시선 하나가 생긴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때부터 나는 하나의 습관을 갖게 됐다.

문제를 볼 때 사람보다 먼저 구조를 보는 것.


그게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