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벚꽃 흐드러진 남원의 봄,
천변 둑길을 따라 걷던 그날—
눈부신 꽃비 아래, 어머니는
낡은 지갑 하나를 조용히 내밀었다.
"누가 줬어. 나는 쓸 일 없응께, 너 써라."
꽃처럼 고운 외형이었지만
속은 해진 가죽, 바스러지는 조각.
그 순간 떠오른 남편의 구두,
아끼고 아껴둔 끝에 ‘아끼똥’이 되어
발끝에 묻어 나오던 가죽의 잔해들.
그 지갑도, 어머니도
같은 길을 걷고 있었던 건 아닐까.
화려한 벚꽃 사이,
어머니 얼굴에 번지던 검버섯처럼
지갑은 조용히 오래된 사랑을 품고 있었다.
왜 하필 나였을까,
왜 서러운 마음을 담아
그 조각을 건네셨을까.
당신의 사랑은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그만큼 진실했고, 그만큼 무거웠다.
2024년 11월 4일,
당신이 멀리 소풍 가신 날,
나는 지갑을 다시 열었다.
남아 있던 것은 상처,
그리고 너무 늦게 알게 된 마음.
봄은 다시 오고, 꽃은 또 핀다.
하지만 그날의 벚꽃은,
나에게 영원히 끝이 되었다.
사락사락 피어난 젊음과 사랑,
결국 사르르 사라지는 것들.
그 순간만큼은, 당신을 생각한다.
흩날린 꽃잎 속에
꽃비 속 지갑에
숨겨진 마음을
가슴 한편에 조용히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