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단편선 01

해바라기

by 강한상

햇살이 끊임없이 쏟아지던 오후,

연희는 물뿌리개를 손에 든 채 거실을 서성였다. 손끝에서 물방울이 흘러내리고, 화분 속 잎사귀 위로 작은 빛망울이 맺혔다. 화분들 사이를 천천히 훑던 그녀의 시선이 거실 한가운데에서 멈췄다. 그곳엔 커다란 해바라기가 있었다. 다른 화분들에 비해 유독 눈에 띄는 존재였다. 줄기는 길고, 단단했으며, 그 크기는 마치 무엇인가를 감시하는 거대한 눈 같았다. 그것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연희는 느꼈다. 손을 천천히 뻗어 줄기를 어루만졌을 때, 마치 살아있는 존재를 만지는 듯한 떨림이 손끝에 전달되었다. 그녀의 얼굴엔 알 수 없는 미소가 얹혔다.


연희의 집은 언제나 유난히 고요했다.

가구를 옮기는 소리도, TV 소리도, 심지어는 사람의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저 가끔, 낮은 허밍 소리만이 공기를 가르며 흐른다. 음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다 결국 멈춰버리는 그 소리는 묘한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마치 공기가 그 소리를 삼키는 듯, 침묵이 다시 찾아오면 사람은 어느새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린다.

그날도 연희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 갑자기 손을 멈췄다.고무장갑을 벗어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고무장갑에 묻어 있던 흙은 물줄기 속에서 씻겨 나갔고, 그 흙물이 싱크대에 검은 물결을 일으켰다. 그런 작은 일상이 반복될 때마다 연희의 집 안은 더욱 불안한 정적 속에 잠겼다. 거실 한쪽, 해바라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 밤, 어둠 속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며 서 있었다. 마치 무엇인가를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해바라기는 노란 꽃잎이 활짝 펼쳐져 있었지만 무언가가 이상했다. 꽃의 중심부는 마치 녹아내린 밀랍처럼 울퉁불퉁하게 굳어 있었고, 그 불규칙한 굴곡은 일반적인 꽃의 모습을 벗어나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표면의 굴곡은 어딘가 사람의 형상을 닮아 있었다. 울부짖는 사람의 모습처럼 보였다. 가만히 보면 얼굴이 이리저리 뒤틀린 듯했고 그것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연희는 그것을 보며 아무 말 없이 손끝으로 꽃잎을 천천히 만졌다. 꽃잎은 부드러웠지만 마치 살아 있는 살결처럼 손가락을 따라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연희의 눈동자가 조금씩 흐려졌고, 입가에는 느린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 미소는 마치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기라도 한 듯 이질적으로 길게 이어졌다. 어느 순간, 그녀는 낮고 일정한 허밍을 시작했다. 그 소리는 거실을 맴돌며 무겁게 가라앉았다. 부드럽게 이어지던 소리는 갑자기 끊어졌고 고요함만이 남았다. 그 순간, 해바라기의 꽃잎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옆집에 사는 송 씨는 그 집의 기이한 고요함이 점점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집인데 소란 없이 이렇게 고요한 집은 처음이었다. 그 고요함 속에서 송 씨는 무엇인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몇 번이고 고민하다 결국 송 씨는 연희의 현관을 두드렸다. 그녀의 두드림 소리는 어둠처럼 고요한 공기 속에서 울려 퍼졌다. 한참 후, 문이 열리면서 연희의 창백한 무표정한 얼굴이 문틈으로 나타났다. 송 씨는 불편한 기분을 애써 웃음으로 감추며 말했다.

"저기… 이사 오셨나 봐요… 집이 조용하네요...” 송 씨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연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의 눈은 그저 천천히 송 씨를 훑었고 마치 집에 들어오라고 하는 듯 비켜섰다.

여전히 말은 없었다. 집에 들어서며 분위기를 전환시키려는 송 씨의 눈엔 거실 해바라기가 눈에 들어왔다. 송 씨는 떨림을 감추며 말을 꺼냈다..

"거실… 화분들이 참 잘 자랐네요. 특히… 저 해바라기…"

연희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고요한 태도에 송 씨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느꼈다. 그 순간, 송 씨는 해바라기에 손을 뻗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손끝이 꽃에 닿으려는 순간, 송 씨는 화들짝 놀란다. 가까이서 본 해바라기의 모습이 너무 괴상하게 일그러져있었다.


송 씨의 손이 멈췄다. 귓가에 낮고 흐릿한 허밍이 들리기 시작했다. 무심코 흘릴 수 있을 정도로 낮고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음의 진행이 불규칙하게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며 송 씨의 신경을 긁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연희가 서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웃고 있었다. 입꼬리만 기이하게 올라간 미소였다. 송 씨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연희의 표정은 점차 일그러졌으며 눈과 입술에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곤 갑자기, 연희는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그대로 서 있었다. 송 씨는 그 정적 속에서 숨을 멈춘 채 연희의 눈동자가 계속해서 자신을 향해 무표정하게 쏠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시간을 잃은 듯 그 서늘한 침묵이 송 씨의 가슴을 조여 왔다.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연희의 모습에 송 씨는 밀려오는 공포를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고개를 돌리며 문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며 문을 열고 집을 나서자 문은 스스로 닫혔다. 송 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어둠과 적막이 다시 시작됐다.

연희는 해바라기 앞에 앉아 있었다. 축 늘어진 꽃잎들은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늘진 조명 아래서 미세하게 흔들렸다. 손끝으로 꽃잎을 쓰다듬던 연희는 잠시 멈춰 서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 안으로 향했다.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뚫고 짧게 이어졌다. 방 안에는 가구들이 어둠 속에 엉겨 붙은 형상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연희는 책장 위로 손을 뻗어 먼지 쌓인 액자를 꺼냈다. 액자의 표면을 쓸어내리자 어둠이 걷히듯 사진 속 두 남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두 사람은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남자의 얼굴은 어딘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다. 특히 그의 눈은 볼펜으로 깊게 그어져 지워진 필름의 하얀 껍질들이 두드러졌다. 연희의 입가에는 다시 천천히 미소가 퍼졌다. 그녀는 손끝을 사진 속 남자의 얼굴에 가져다 대고는 가만히 멈췄다. 순간, 연희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이내 멈추었다.


해바라기는 밤의 어둠 속에서 더 도드라졌다.

꽃잎은 어둠에 잠식된 노란색을 띠었고 꽃 중심부의 굴곡들은 이제는 더 뚜렷하게 사람의 얼굴 같아 보였다. 울부짖는 표정의 해바라기 꽃은 연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연희는 해바라기 앞에 다시 앉았다. 품에 안은 액자를 조심스레 내려놓고는 다시 허밍을 시작했다. 그 음은 이번엔 처음부터 낮고 느리게 흘렀다. 노랫소리는 점점 낮아졌고 속삭임처럼 변했다. 그리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둠 속에서 연희의 미소는 서서히 굳어졌고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이 어둠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