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춘 자리에서
15일간의 꿈같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산책하고 차를 마시고, 책을 보고 생각에 잠길 때.”
노래 〈일상으로의 초대〉의 가사처럼, 다시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내 일상은 작년 여름 끝자락에 맞이한 한 사건으로부터 크게 달라져 있었다.
가족력도 없었고, 주변에 암 환자도 없었던 나에게 유방암이라는 단어는 너무 낯설고 차갑게 다가왔다. 하지만 진단과 수술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수술 뒤 몰려온 합병증, 잠을 허락하지 않는 불면의 고통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심연으로 끌어내렸다.
그 무렵 나는 물건을 버리고, 집을 정리하며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언젠가’라는 말로 미뤄두었던 소망들을 꺼내 적었다. 가족을 위해 포기해 왔던 작은 바람들, 나 자신을 위해 하고 싶었던 일들. 감정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요동쳤지만, 그 속에서 얻은 깨달음은 분명했다.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시작의 기쁨을 잘 알고 있는 나의 시작은 늘 설렘이었고, 어떤 끝도 또 다른 도전의 출발이 되곤 했다. 그래서 요양병원의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내가 좋아하던 일상‘걷고, 보고, 느끼고, 기록하는 삶’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쉬움인지, 미련인지.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비로소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찾아왔다. 병을 겪으며 나는 그림을 배우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위한 성취가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한 기쁨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늦게 찾아온, 값진 선물이었다.
사람들은 인생을 열정, 권태, 성숙의 세 단계로 말하곤 한다. 지금 나는 병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된 권태기를 지나고 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시련이 주어진 걸까. 원망할 대상도 찾을 수 없어 더 막막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를 위로해 주는 문장이 있다.
“권태롭다는 것은 그만큼 애썼다는 증거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말한다. 괜찮다고, 잠시 쉬어가도 된다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맞이한 권태기이지만, 불꽃처럼 치열했던 나의 삶이 이제는 숯불처럼 은은하게 오래 남아주기를 바란다고.
아픔 속에서 생각지 못한 딜레마도 찾아온다. 가족에게 배려받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면서 그 안에서 더 깊은 외로움과 서운함이 생겨난다. 연민은 나를 고독 속에 가둬버리고, 감정은 때로 노력으로 제어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
며칠 전, 아버지 댁에 머물던 어느 날이었다. 손이 시려 호호 불어가며 굴을 까던 아버지가 내 입에 한 점 넣어주셨다. 짠맛에 가슴이 뻐근했지만, 동시에 달콤한 그 굴 맛을 잊지 못한다. 그 순간의 아버지와 나눈 시간도, 다시 오지 않을 오늘 하루의 순간도 눈부시게 소중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임을 기억하며, 인생의 권태기를 지나 성숙기의 삶을 준비하기를 다짐한다.
아픔은 나를 멈추게 했지만, 멈춘 그 자리에서 나는 또 다른 빛을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