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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윤 Dec 29. 2024

대만 상공에 띄워보낸 우리들의 이름은 어디에 있을까

윤(潤), 빛나게만 자라라

 

내 이름 세 글자의 마지막 글자는 '윤'이다. 윤택할 윤. 반짝 반짝 빛나게만 자라라라며 부모님이 세상에 태어난 내게 처음으로 주신 선물같은 의미의 한 글자.


그리고 너의 이름의 첫 글자도 '윤'이다. 파평 윤씨. 뿌리를 의미하는 글자. 내 이름 속 '윤'이 뜻을 담았다면, 너의 '윤'은 뿌리를 담았다. 결국 그 차이는, 지금 돌이켜보면 아주 사소한듯 커다란 것이었다. 빛나게 자라기만 하면 됐던 사람과, 지켜야 하는 게 많았던 사람의 차이일까.


한글은 자음 14개와 모음 10개로 이뤄진다. 초성, 중성, 종성을 조합해 총 11,172 가지의 글자를 만들 수 있다. 그 많은 글자 중 하나, '윤' 이라는 글자를 우리는 이름 중 하나로 받아, 너는 처음에 쓰고 나는 마지막에 쓰면서 그렇게 서로 다른 자리에 같은 글자를 품고 33년을 살아왔다.


소개팅용 사진을 보고 별 마음에 안 들어, 전날 소주 3병을 먹고 나간 그 첫 만남때부터 취기 아직 안 가셨나 너라는 사람이 참 좋았더랬다. 첫 눈에 반했다는 감정을 죽기 전에 경험해보았던 딱 한 순간이었다. 좋아하면 공통점부터 찾는다는데, 이름에도 공통 글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 사귀고 나서는 나는 내 이름의 마지막과 너의 성을 연결하여 다섯 글자로 만들어 우릴 불렀다. 나는 그래서 항상 1:1이 아니라, 우리 자체가 1이었다. 그러나 이젠 내 이름 뒤에, 네 이름이 붙을 수 없으니 나는 내 이름 마지막 글자를 쓸 때마다 이어쓰고 싶은 마음을 눌러 담느라 한동안 한참 아플 것 같다.

 



한껏 유치했다.


사랑하면 유치해진댔나, 넌 20대로 돌아간 것 같다며 내게 사랑담은 고백을 했지만 나는 한 술 더 떠 초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특히 거실에서 네가 맥주를 먹다가 '야레야레 못말리는 아가씨' 춤을 춰 줄 땐 더 그랬다. '왜 그렇게 못 춰?' 하면서 덩달아 같이 일어나 누가 더 길티플레저인지 대결하던 순간을 앞으로 다시 누군가와 할 수 있을까?


같이 갔던 여행이었던, 남이섬만 해도 그랬다. 참으로 유치했다. 수영장에서 30대가 넘은 우리 둘은 끝말잇기 게임을 하면서 진 사람을 수영장 물 밑으로 잠수시키기도 하고. 숙소 바로 앞 계곡 입구를 잘못 찾아 두 손 꼭 잡고 거센 물길 가르며 연어처럼 올라가면서도, '앞으로 많은 일들도 연어처럼 이렇게 헤쳐나가자!' 를 외쳤다. 그냥 다시 뒤로 나가, 조금만 앞으로 걸으면 입구를 찾을 수 있었는데도 발목에 잠긴 물살이 우리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인듯 여기며 넘어질까봐 전전긍긍하며 웃기도 했다.


밤엔 숙소 옆 코인노래방에서 또 우리 둘이 좋아하던 박효신 노래를 목청이 터져라 흠씬 부르며, 어둑하고 자잘한 밤공기 위로 가사를 띄워보냈다. 바베큐를 먹으면서 서로를 모른 채로 살아왔던 30여년의 감성을 나눈 대화 끝엔,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눈물과 취기로 얼큰히 취한 후 또 밖으로 나가 '방방'을 타다가 토할 것 같다며 방방 위에 누워서 촘촘한 밤하늘을 보기도 했다. 아이처럼 배를 까고 누워있는 네가 나사빠진 모자른 아저씨 같았지만, 그 꼬질한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또 사진으로 남겼었다. 모든 게 행복이었다. 대체 행복이 아닌 것들이 없었다.




행복하기 위한 공식


너는 어제도 내게 행복하라고 했다. 헤어진 건 한 달이 넘는데, 또 한번 이별 1일차가 됐다. 밤 늦은 무음의 부재중 전화 2통은 내가 또 놓치고 말았다. 잘 된일인지, 잘못한 일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2주 전 제발 날 차단해달라고 빌었던 내게, 싫다고 완강히 거부했던 네 마음도 요란히 소란스러운걸까. 빨리 1년이, 아니 6개월이라도 흘렀으면 좋겠다. AI 시대라는데, CHAT GPT에게 물어보니 이별 후의 감정은 어바웃 6개월이면 잠잠해진다더라. 21세기의 대문명의 시작인 AI는 내게 너로인해 샤머니즘, 무속신앙 정도로 격하됐다.


내게 행복이라는 감정은, 같이 있을 때만 느낄 수 있게 해놓고 혼자 행복하라고 하니 참 초등학생한테 대학교 수능문제 풀라고 던져주는 것 아니냐. 공식이라도 알려줘야 대입이라도 할 것 아닌가. 난 AI가 아니라, 혼자서 딥러닝은 못 해.


뭐라도 해봐야 할 것 같아 평소에 내가 좋아했던 케이크나 먹으러 가야지하며 나왔는데 목동대로 대로변 한 빵카페에서 빵굽는 냄새를 맡으니 그대로 구역질이 났다. 요즘엔 살기 위해 먹는 수준까지의 섭식장애가 왔다. 벌써 일주일, 아침엔 샤워를 하면서 토를 하는 것이 일과가 됐다. 다행히 전 날 저녁마다 먹은 게 없으니 이상한 흰색 죽 같은 것만 쏟아낸다. 회사 점심 구내식당은 7,700원 짜린데 꼭 700원어치만 먹으면 분에 넘친다는 걸 말하듯이 목구멍에서 넘어가지 않는다. 나 자체가, 나 이외의 세상 모든 물질과 싸우는 백혈구가 된 것 같다. "이정도면 충분해" 라고 말하며 모든 것을 밀어내면서, 정작 갈구하고 있는 진통제는 어딜 봐도 구할 수가 없다.




빛과 연소



유리구슬처럼 반짝이는 순간들만 찬란히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 이름처럼, 나는 빛을 머금고 있는 그 순간만을 필요로 했다. 하필 너의 마지막 글자는 불꽃 환이었다. 찬란함을 넘어 하늘 끝까지 밝게 비춰주다가 결국엔 내게 재가 되었다. 대만의 상공에 띄웠던 우리 한자 이름을 적은 빨간 풍선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이미 그 순간, 우리의 한자를 적어 올려보냈을 적부터 예견된 일들이었을까? 곧 연소될 윤택함이라는 것


윤택하다 : 광택에 윤기가 있다.

불꽃 : 기체가 빠르게 연소하면서 빛, 열을 발산하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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