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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윤 Dec 30. 2024

바람이 차네, 하지만 여전히 너를 사랑해



  안녕 현아, 여전히 속시끄럽지? 수많은 질문과, 나오지 않을 답들이 많은 날들일 것 같아. 감히 언니가 상상할 수 없는 슬픔이라 이런 글자를 네게 남겨보는 것도 마음에 돌 하나 얹은 듯 하다. 세상을 안겨준 엄마를 잃는다는 것. 도대체 그 버거움을 어떻게 들쳐메야할까. 오늘은 언니도 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슴에 간직했었던 문장을 널 위해 알려줘보려고 해.


언니가 고등학생일 때, 공부를 하며 본 EBS 수능 영어 지문에 이런 문장이 있었어. 문제를 풀다 말고 이 한 문단에 푹 빠져, 독서실 안에서 소리없이 울었던 게 기억나네. 오른쪽 창가에서 햇빛이 들어오던 그 책상마저 아직 뚜렷해.




"어차피 지금 아프고 힘든 날은 1년 후, 2년 후가 지나면 기억도 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왜 힘들었지? 하며 뒷간의 흑역사로 남을 일이다. 더 나아가 우주에서 바라보면 우리의 고민과 슬픔은 먼지 한 톨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지문이 왜 이렇게 오래 남았을까.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처럼 힘들 때마다 이 글을 반복해서 생각하곤 해. 그리고 대체로 맞더라. 일순간 소리소문 없이 힘들없던 감정은 날아가고, 아주 작게 그을린 희미한 재 만을 떠올리게 됐지. 그럼에도 도저히 안 될 것 같이 울음을 삼킬 수 없어 토해내야 할 때. 그럴 때면 무의식적으로 1년 후, 2년 후의 나를 떠올렸어. 더 나아진 미래의 나를 상상하며 한 걸음씩 걸어가보려 했어.


하지만 말야, 우주 속 먼지가 아니라 삶에 박힌 거대한 나무 같은 문제도 있더라. 500년 된 나무처럼 뿌리째 박혀서 절대 흘러가지 않는 일 말이야. 그 중 한 가지는 여전히 내게 큰 상처로 남아 있어. 언젠가 내가 가장 힘들었던 순간, 가장 믿고 있던 사람에게 말했었는데


"바람이 차네. 여전히 나는 너를 사랑해." 라는 아주 멋진 위로의 말을 들려주더라. 너의 오빠였어.




그 말 한마디가 내게 오래 남았어. 그리고 지금은 그 말을 너에게 말해주고 싶어. 당시와 비슷하게, 또 겨울이네. 힘든 게 많은 차디차고 하이얀 계절이야. 그 때처럼 바람이 차지만, 여전히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단다.


세상에 나서 눈을 뜨고부터 항상 있던 부모님을 잃는다는 건 내겐 상상해본 적도 없는 아주 커다란 일이야. 너무나 당연한 존재인 세상의 디폴트 값이라, 인생의 순리가 삶과 죽음이구나를 여러 경험을 통해서야 비로소 알게 될 때, 그제서야 물끄러미 부모님의 사랑을 다시 보게 되는 게 사람인데..


여러 번, 사랑하는 존재들과의 이별로 단련을 많이 한 언니조차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인데 그 작은 마음으로 버텨내고 있을 네가 오늘 온 마음으로 슬퍼.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말, 지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언젠가, 텅 빈 마음을 억지로라도 무엇으로 채워야겠다고 느끼게 될 날이 올 거야. 네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밤이 꼭 올 거야.


당분간은 마음을 쏟아내는 날들이 필요할 거야. 언니는 그럴 수 없어서 십몇 년을 묻어두었지만, 묻어두는 건 답이 아니었어. 마음을 비워내야 해. 울고, 속마음을 쏟아내고, 토해내야 할지도 몰라. 그리고 그다음은 다시 채우는 날들이야.




언니는 그때 활자 중독에 빠졌었어. 가만히 있으면 생각이 몰아치니까 글자를 읽으며 유난히 많아지는 생각의 소음을 멈추려 했어. 종이에 박힌 글자를 보면 그 메시지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 그러다 보면, 네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질 거야.


글을 직접 써보는 것도 좋아. 지금 네가 힘든 이유를 한 줄, 두 줄, 한 장씩 적다 보면, 그것들이 내 앞에 놓이게 돼. 그러면 그 문제를 조금씩 컨트롤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거야. 물론 시간이 지나면 다시 무너질 수도 있지만,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네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게 될 거야. 어느 순간, 고개를 내미는 답들이 있을 거야. 그 친구들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면 돼.




언니에게는 반지가 하나 있어. 절대반지처럼, 마음이 힘들고 꽉 막힐 때 그 반지를 만지며 속으로 되뇌곤 해. "할 수 있다. 괜찮다." 현아, 네가 의지할 무언가를 찾아봐. 작은 물건이어도 좋아. 그 물건이 네 마음을 붙잡아 줄지도 몰라.


그리고 철학을 읽어봐. 어린 나이에 지금은 어려울 수도 있지만, 쉬운 철학 책들은 마음을 잠재우고 명상 효과도 있어. 니체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어. "평탄한 삶보다 험난한 운명이 주어져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웃기지? 때론 지랄맞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니체를 이해하게 되는 날도 올 거야.


지금은 많이 울어도 괜찮아. 가장 약해진 순간이 가장 성장할 수 있는 시점이기도 해. 그리고 무엇보다, 너를 사랑해 줄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걸 잊지 않길 바라.


 당연히 메리 크리스마스가 아닌 오늘이었겠지만, 닿지 못할 메세지로 한 번 더 위로를 보내.


 세상에 산타가 진짜 있다면, 한 번쯤은 언니가 멀리서 널 생각하는 마음을 네게 데려다주면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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