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연애를 하면서 보냈던 모든 날들이 초코파이와 우유를 동시에 씹는 것처럼 완벽하게 맘에 들지도 않았지만, 모든 파노라마가 박한 것은 아니었어.
많은 더하기 빼기를 상계치고서도, 내가 이 연애를 귀했다고 여기는 이유는 '네가 내게 무엇을 해주었기' 때문이 아니야. 반대로 네가 내게 해준 게 별로 없다는 이유로, 내 연애가 가벼이 툭툭 '걔가 널 사랑한 건 맞아?' 라는 질문형으로 소환되는 것도 온연히 받아들이진 않아.
그래도 네가 내게 해주었던 것들의 파편이 일상생활에서 톡톡 올라오는 게 무서워, 모든 걸 차단시켜보려고 내 방안을 훑어봤어. 아, 나 핸드폰도 아이폰으로 바꿨어. 앨범보다가 우는 일도 없애려고.
회사 물물교환시장에서 받아왔다는 피카츄인형, 너의 전 직장의 마스코트인형 촘촘이, 이젠 빛바랜 손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물받은 카카오 전자손난로 이쯤이 치워야 할 목록 순위 끝이더라.
가시적인 물질로 받은 게, 이렇게 단 3분만에 모을 수 있는 게 끝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파편으로 이다지 힘든건가 멍해졌어. 그리고 깨달았지 '더 최악이게 됐네.' 오히려 대개 너와 함께 있을 때 받았던 행복은, 눈 앞에 남겨지진 않았지만 같이 이뤄낸거 였으니까.
꼬박 두 달의 주말을 매일 같이 독서실 옆자리에서 함께 공부하며 땄던 너의 CFA LV.3, 나의 CDCS. 같이 블로그를 시작하며 목표로 했던 너의 투자성과와, 나의 일상협찬 등. 매주 주말 아침 카페로 달려가 같이 책을 읽으며 쌓았던 양식의 시간들. 여행을 다니며 늘게 된, 이젠 너 마저도 인정하는 내 사진 실력. 이것 늘리겠다고 새벽까지 같이 공부했던 거 기억해? 그리고 악셀과 브레이크 위치도 까먹은 나를, 이젠 혼자 야간 드라이브까지 맘대로 할 수 있게 해준 너의 운전교습. 마지막엔, 이별 후의 감정 널뛰기를 글로 승화시켜보겠다고 도전했던 브런치스토리 작가까지.
이건 시간이 지나도 계속 나올 파편이잖아. 눈에서 치울 수도 없는데 말야.
사랑이 아녔다면 우리가 함께하면서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파괴되어야 나쁜 거라던데, 나를 이루는 모든 수준은 외려 작년보다 무릇 익어보이는 걸. 이런 파편들은 기억에서 어떻게 지우지. 단순히 향수 하나, 지갑 하나, 무엇 하나 받은 건 치워버리면 그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박하다'라는 단어를 썼다는 게 내게 미안할까봐. 그런데 그 미안하다는 방향성 조차 레이더를 상당히 잘못 잡고 있는 것 같아 말해주고 싶어. 내가 좋아했던 실시간과 일상을 담은 연애, 그리고 정말 네가 내게 박했던 것들.
내가 좋아했던 건 말이야
내가 좋아했던 건 말야, 63빌딩 맨 윗층에서 먹었던 60만원 짜리 디너코스가 아니라 노량진에서 같이 공부하면서 늘어진 체육복 주워 입고 3,500원짜리 컵밥을 나눠 먹었던 일이야.
너와 경복궁 야간개장 투어를 하고 서촌에서 먹었던 한 잔에 몇 만원 짜리하는 위스키가 아니라, 온면에 양꼬치를 먹으며 한 잔 가득 입에 털어 넣었던 소주였단 말이지. 각 잡고 불편한 거 말고, 일상 터놓는 사사로운 거.
이번 크리스마스는 같이 보내지 못했지만 호화스러운 호텔에서 값비싼 선물 주고 받는 것 보다, 집에서 같이 코스트코에서 사온 스테이크를 썰며 시청하던 나는솔로. 그리고 재밌는 상황이 연출될 때마다, '남녀심리를 설명해줄게' 하며 ' 리모콘 stop '버튼을 연신 눌러대던 그 시간이 좋았던 거야.
크루즈 일등석 위에서 보는 불꽃놀이보다, 여의나루역 앞 돌계단에서 맥주 한 캔 하며 엿보던 '원래는 남의 불꽃놀이'에서 떨어진 한 조각 풍경도 너랑 함께라면 좋았다는 말이야.
박하다는 건 말이지
박하다는 건 말야, 같이 뭔가 큰 걸 안 했다는 의미가 아냐. 내가 원했었던 걸 같이 못한 게 박한거지. 예를 들어줄까. 자, 이제 네 욕이니 눈 크게 뜨고 봐야 해.
그렇게 외워달라했던 7월 18일. 그리고 내 핸드폰 번호 말이야. 열 한 개 숫자 외우기에 네 머리가 박한 것도 아닌데 말야?
오래 기억에 남는 전화 속 목소리, 출근 잘하고 있냐는 안부 카톡, 아직도 내 침대 머리맡 선반에 올려져 있는 너의 첫 손편지 같은 게 일말의 합의도 없이 갑자기 없어지는 것 말야. 얼굴보고 헤어지자는 부탁을, 말끔히 무시해서 마지막조차 준비도 정리도 못하게 된 일 말야.
날 차단한 건 풀지 않으면서, 너가 하고싶을 때만 하는. 내가 안 받을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 하는 오늘했던 그런 전화 말이야.
얘기 좀 하자고 울면서 왕복 세시간 거리를 찾아갔는데, 돌아가라는 문자 한 마디.
내가 또 이것저것 해주며 챙겨주면 부담스러워할까봐 협찬을 빌미로 비싼 안경 사준거, "오다 주웠다 " 하며, 너의 짭펜슬 치우고 던져준 애플펜슬.
난 선물을 이렇게 간단히 주는 것 자체가 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작년 너의 생일 여의도에서 스테이크 썬 후, 마음담은 영상편지에, 미역국에, 풍선으로 꾸민 집 생일파티, 위스키 선물과 우리의 연애앨범으로 장식했던 걸 '부담'이라고 표현한 너 때문에, 해주고 싶은 모든 마음을 눈치보면서 저 끝으로 눌러담게 한 그런 것들이 박하다는 거야.
앵간히 큰일났다 싶었지
내 생일을 잊어서 미안하다는 너한테, 단 한 번 토라지지 않고 "넌 원래 생일 안 챙긴다며. 그래도 생일을 외우기는 해주지 좀!" 이라면서 우도 선착장을 오를 때부터 생각했어.
내가 당연한 이벤트에, 당연하지 않은 일인데도 화가 나지 않는 걸 보니 너에게 그냥 주고 싶기만 한 사랑인가보다. 아마 이번은 내가 못 해봤던 그런 아가페 어쩌구 뭐시기 그런 류인가보다.
앵간히 큰일났다 싶었지 아마.
이 모든게 끝난 이후에도, 해주고 싶은 것들을 마저 못 해줬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아픈 걸 보니 그냥 내 맘대로 다 표현하고 지지고 볶고 끝낼 걸 그랬어. 거실 매트도, 로봇청소기도 다 사주고 싶었는데. 너 맘 하나, 몸 하나 편하라고.
박해서 미안했다길래 열이 받아서 써봤는데,
왜 헤어진 마당에, 내 생각이 나서 가져왔다면서
전자손난로를 손에 쥐어준 거니. 이제 내 손이 시려도 잡아주지 못 할테니 하는 마지막 배려인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