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는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갔을까

by 옆집 사람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
: 특정 지점에서 일어난 사건이 충분한 시간이 지나도 영역 밖의 관찰자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시공간의 경계에서 나타나는 특성



너와 나는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갔을까.

버스 정류장에서 슬그머니 내밀었던 검은 3단 우산이 기억 속에 희미해지고, 수줍어 몰래 찍었던 내 검은 캔버스화와 네 빨간 구두가 나란히 찍혔던 사진이 메모리에 더 이상 남아있지 않게 되었더라도.

저 드넓은 순천만 갈대밭을 팔짱 끼고 걸어 나갔던 그날의 공기가 이젠 차가웠는지 뜨거웠는지 습했는지 어땠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고, 네가 처음으로 써주었던 손 편지가 몇 번이고 재활용되어 이제는 종이로 존재할까 조차 알 수 없게 되었더라도.

눈 오던 어느 새벽, 너와 네가 꼭 끌어안고 함께 뿜어내었던 담배연기가 이제는 저 멀리 지구 반대편에 가있고, 너와 보았던 수많은 영화들의 이름들이 이젠 기억이 나지 않게 되었더라도.

너는 뒷좌석에서, 나는 보조석에서. 서로 룸미러로 몰래 눈빛을 나누고 시시덕대며 향하던 목적지가 이젠 세상에 없는 곳이 되고, 네가 몸에 두르고 다니던 자몽향이 더 이상 내 옷에서 나지 않게 되었더라도.

아주 늦은 새벽녘, 너와 내가 체온을 나누던 그 골목들이 더 이상 골목이 아니게 되고, 네가 누웠던 이부자리가 더 이상 내 잠자리가 아니게 되었더라도.

마디마디 꼭 깍지 끼고 도도도 뛰어가던 날 내렸던 비가 온전히 바다랑 합쳐지고, 네가 히히 웃으며 사장님! 늘 먹던 걸로 주세요! 했었던 내 부엌이 이제 더 이상 내 부엌이 아니게 되었더라도.

이리 늦은 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무슨 다른 요사스런 기운 때문인지. 이제는 한 명 한 명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느닷없이 궁금해져 버려 통 잠이 오질 않는다.

너와 나는 그래, 사건의 지평선을 영영 넘어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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