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에 따라 성질이 변한다
안녕하세요. 이 글은 2024년 12월 4일에 작성한 글이에요. 조금 수정하긴 했습니다만 예전에 작성한 것을 다시 올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쓴 글은 두 가지 종류로 나뉘어요.
첫 번째는 작성하고 나면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 글, 두 번째는 자꾸만 곱씹어 보게 되는 글입니다.
여러분의 글도 이런 기준으로 나뉘나요?
오랫동안 고민하고 쓴 글은 쓰고 나면 끝나 버리는데, 새벽에 뒤척이다 일기처럼 써 내려간 이 글은 자꾸 눈에 밟혀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래 전문이에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정폭력과 더불어 온갖 악행을 저지른 아비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싶으니, 다음에는 본인의 자식으로 태어나란다. 마음이 요동친다. 나는 성악설을 믿는다. 사람은 본디 악하게 태어나 적절한 교육을 통해 순화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기에 악한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은 그저 덜 배우고 덜 진화했구나, 그렇게 생각해버린다.
‘저 사람이 저렇게 살고 있는 것은 무언가의 부재다. 시간에서 아무것도 낚지 못한 탓이다. 미끼를 만들 시간이 부족했던 거다. 그러니 저이는 저곳에 두고 나는 갈 길을 가세.’
사람을 용서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없다. 용서할 자격이 내게 주어진 적 없다는 말이 더 맞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용서를 구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건 아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드니까, 그냥 그렇게 된 것뿐이다. 아들은 어째서 아버지를 용서했을까. 폭력과 갈취, 강압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왜 그랬을까. 혹시 당신은 내게 악행을 가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거라는 다짐이자 연민은 아닐까? 그의 환경은 어떻게 그를 만들었나. 환경은 아마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아니면 저런 식으로, 그러니까..
환경은 사람을 만든다.
환경은 ‘이렇게’ 사람을 만든다.
요동과 파동이 교차해 부스러기를 남긴다. 가려진다. 시간이 간다. 발견한다. 턴다. 등골이 서늘하다. 걷어낸다. 보인다. 아래의 것 말이다. 매끈한 시멘트 위를 고의로 밟고 지나간 발자국이 보인다. 더러워진 손과 발이 보인다. 축축하게 흐르는 것이 눈물 콧물인지 땀인지도 모른 채 화장실 한 번 다녀오고 다시 생각한다.
귤화위지.
최근 사랑이라는 감정을 짙게 느꼈다. 내 사랑은 목적과 이유가 없다. 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 그냥 뭐가 없다. 헌신과 혼신의 사랑은 영혼까지 물들인다. 나는 지금 얼룩덜룩하다. 아 근데 앞은 내가 물들이는데, 뒤는 남이 물들이는 거라데? 어느 여행 에세이에서 읽었다. 그 말이 맞다면 지금 내 뒤는 하얗다. 물이 다 빠져 이제야 흰색이 된 걸 수도 있고, 이제야 색안경을 벗은 걸수도 있다. 앞의 물이 빠질 즈음에는 완전한 순백이 되는 거다.
그러니 아들에게 묻고 싶다. 그의 영혼은 무언가 다른 것 같아서. “당신의 용서가 혹시 사랑은 아닐까요?”
사랑은 받는 게 아니라 하는 거잖아요. 상대가 주는 사랑도 내가 수용해야 사랑이죠. 용서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용서는 상대가 우선권을 쥐고 있다는 거예요. 그가 내게 빌어야 가능한 것이니. 나만 용서해봤자 쓸모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혹시, 그게 사랑이 맞다면 말입니다. 사랑을 하는 거 말이에요. 어떻게 그런 식으로까지 사랑을 하세요? 용서는 사랑이 아닐까요?
나는 매 순간 느끼는 감정을 영원한 글로 적어냄이 좋다. 그렇게 오래 간직하고 싶다. 절판된 도서를 웃돈을 얹어가며 구매하는 것처럼, 고이 비닐 속에 넣어 보관하는 것처럼.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지난 4년간 변색하고 퇴색된 것들과는 달리 이 마음 하나는 아직도 숭고하게 이 자리 그대로 남아 있다.
서울은 포화상태다. 좋고 싫은 것 상관없이 모든 것이 넘친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는 올해로 연고 없는 서울에 올라온지 5년째다. 요즘은 어딜 가나 밀치고, 밀쳐지고, 부딪힌다. 집에 돌아오면 어디 한 구석은 쓸려있다. 마음이든 살이든 아픈 건 매한가지다.
사람에게는 일정 영역의 개인 공간이 필요하다. 비단 물리적 거리만을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 말하자면 행복의 영역이다.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 어릴 적 가지고 놀던 레고 인형으로 주변을 둥글게 에워싸고 그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뭐 그런 공간.
그러나 5년간 나의 영역이 보장된 적은 없다. 누군가 금을 밟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의사도 묻지 않고 침범했다. 나는 이 과정에서 많이 다쳤다. 마음의 문도 걸어 잠갔고, 열쇠를 어디 두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러니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연고 없다는 말이 가끔은 정말 연고(軟膏) 없다는 말로 들려 웃기다. 나는 연고(緣故)도 없고 연고(軟膏)도 없는데. 이 환경은 어떤 식으로 나를 변화시키고 있어?
환경과 사람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아스팔트에서도 민들레가 피어난다는 기적을 빙자한 낭만은 질색인데 말이다. 예전에는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고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그저 안쓰러웠다. 함부로 말해서 미안하지만 여튼 그랬다.
대단하다는 생각보다는 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정말 안쓰럽다, 안아주고 싶다, 뭐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일수도 있는데, "극복해서 대단해!" 라고 했다가 쟤가 주저앉으면 어떡해?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건 보통 ‘내 주변을 좋은 사람으로 채우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어’ 이럴 때 쓰는 말이니까. 저 사람에게는 “야. 니가 지금 이렇게 된 게 어쩌면 너의 그 안타까운 상황 덕일지도 몰라. 그니까 좋게 생각해 좋게.” 뭐 이런 뜻일 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역겹기만 하다. 말의 껍데기는 사람을 감쌀 수 없다. 우리는 꼭두각시 인형이고, 환경은 조종대를 쥐고 있다.
그럼에도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자꾸 맴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변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일 까?
한때 나는 나 자신이 너무 못났다고 믿었다. 지금에야 믿음이라 말하지만 당시에는 믿을 노력도 필요없는 사실이었다. 무능력하고 도대체가 타인이 좋아할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이대로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씻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그냥 정말 이대로 사라져버리면 누가 나를 찾아 주기나 할까? 라는 생각도 했었다. 바보같은 생각이라는 걸 지금은 잘 안다. 그냥 그 당시에는 삶에 지쳐있었고, 몸도 마음도 힘들어서 정신적으로 약해져 있었을 뿐이다. (그래도 일하고 잘 먹고 책도 영화도 그 시기에 가장 많이 접했다. 청소도 꼬박 잘 하고 두 번의 이사도 했다. 지친 게 맞나?)
그런 나를 변화시켜 준 건 환경이다. 바쁜 일, 긍정적인 동료, 이른 시간 집을 나서고 노을질 무렵 귀가하는 과정에서의 아름다운 풍경. 나를 변화하게 만들어 준 건 그런 것들이었다. 그 환경 속의 나는 언제나 빛났다. 남이 나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건 어떤 말을 하건 상관없이 말이다. 물론 휘둘릴 때도 있었으나 그것은 나의 환경이 아니라, 모래바람처럼 거친 그들의 환경이었을 거라 믿는다.
나는 인간의 눈동자에 맺힌 슬픔이 좋다. 나누면 절반이 아니라 두 배가 된다는 그 슬픔 말이다. 어쩔 수 없이 휘둘리면서도 끝없이 자기 자신을 놓지 못하는 본연의 슬픔이 좋다. 그건 극복의 영역이 아니라 수용이라, 세상 밖에 나오지 않아 순수한 결정이 아름답기만 하다.
나는 수많은 당신들의 삶이 궁금하다.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매너리즘에 빠진 당신이 궁금하다. 당신의 환경은 정말 당신의 환경이 맞는가. 환경이 사람을 바꿀 수 있지만, 사람은 자신의 환경을 결정할 수 있다. 우리는 탓도, 덕도 할 수 없다.
세상에는 분명 기적이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된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힘드시죠? 아는데, 그냥 좋은 생각만 해요 우리, 뭐 그런 말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