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요
요즘 제 청춘이 저물고 있음을 느껴요. 그래서 그런가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납니다. 홀로 서울에 올라와 지내고 있어서 그런 걸까요?
엄마 아빠를 떠올리면 그려지는 얼굴이 있는데요. 최근에 느꼈어요. 제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많이 야위시고 더 많이 늙으셨더라고요. 참 이상한 일이지 않나요. 내가 나이 들어가는 과정은 청춘이 저문다고 표현하지만 정말 무섭게도 부모님은 죽어가는 것 같아서요. 가끔 많이 두려워요. 엄마 아빠에게 이런 말을 하면 등짝을 때리겠지? 사랑해요….
제가 20살 땐 지금의 내 나이인 언니와 오빠들이 정말 말 그대로 어른같고 성숙해보이고, 삶의 문제를 스스로 다 해결할 수 있는 그런 능력자들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막상 그 나이가 되어보니 나는 참 여전히 어리고 순수하고 아직 무엇이 옳은지도 모른 채 조커 카드를 고르고 보는 바보더라고요. 어쩌면 당시의 제가 하던 고민을 그들은 이미 경험했을 것이고, 하지만 다 지나간 일이고. 그럼에 가지지 못한 지혜에 대해 품은 동경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20살 때 품었던 기대와 존경심 같은 것들이 그들을 힘들게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요. 요즘 느껴요. “너는 그래도 다른 정답을 말해 줄 것 같아“ 라며 앞이 보이지 않는 두 갈래의 길 중 자신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정해 달라는 질문을 자주 받거든요. 아마 제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하는 이미지를 꾸준히 전시한 덕분이겠죠? 하지만 죄송하게도 저는 그다지 성숙한 사람이 아니라 타인의 인생에 관여하거나 아무리 작은 선택이라도 그들을 좌지우지할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내가 아직 나 자신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는데 지나간 세월을 살아온 입장으로서, 타인에게도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무력감도 느끼게 해요. 당시의 언니 오빠들도 저의 초롱한 눈망울에서 당신들의 당황한 얼굴을 마주했을까요? 어둠 속의 댄서 속 셀마처럼요. 늦었지만 말하고 싶어요.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사람은 상생하는 존재잖아요. 당신이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당신이 있죠. 예전에는 나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지금은 아닙니다. 내 삶이 순탄하게 흘러갈 때마다 생각해요.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내가 효율적인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매사에 감사하자 뭐 그런 생각이요.
예전에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면 삶이 행복하다는 글을 읽었어요. 정확히 3년 전에는 ‘내가 왜 사소한 곳에 행복을 느껴야 해? 내 행복의 기준치는 아주 높을거고, 나는 아무것에나 쉽게 행복하지 않을 거야’라는 볼멘소리를 내뱉기도 했는데요. 다시 말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당신들이 있어야 내가 있고 당신들도 내가 있어서 존재하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나에게 기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빕니다. 저는 항상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실패할 때도 많지만 오늘 못한만큼 내일 하면 되니까 괜찮아서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에게 기대를 품게 된다면.. 그건 제가 어떻게 해줄 수 없잖아요. 도와줄 수 없는 것에 함부로 기웃대고 싶지 않아요. 이 감정은 뭘까요? 자신이 없는 건지 뭔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서론이 길었지요.
오늘은 저희 아버지 얘기를 해보려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개인의 삶을 내려놓고 가족을 위해 희생한 유일한 인물이거든요. (엄마 얘기 다음에 할게요. 미안해요.)
내가 어릴 적 교과서에서 배운 아버지라는 이미지에 저희 아버지께서 정확히 부합하세요. 나는 태어나서 우리 아버지만큼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저희 아버지께서는 어릴 적 무용을 하셨어요. 지금도 얼핏 봐도 느껴질 정도로 몸 선이 매우 아름다우십니다. 뼈대도 얇으시고요. 그리고 잘 생기셨어요. 저희 어머니와는 소개팅으로 만났는데 첫눈에 사랑에 빠지셨대요. 어머니께서는 대구의 섬유 공장에서 근무하셨는데요. 매일 전화를 걸어 한 시간씩 통화를 하고 쉬는 날은 엄마를 만나기 위해 1시간을 이동하셨어요. 엄마는 이 생각을 했대요. ‘이 사람이라면 어디를 가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성실함이 사랑이라면 이 말이 가장 완벽한 결실이라고 생각해요.
저희 언니를 가졌을 때 아버지께서는 IMF 때도 굳건히 살아남았고 지금은 더욱 크게 자리 잡은 대기업의 신입사원이었어요. 저희 부모님 모두 대학을 나오지 않음에 대해 아쉬움을 가지고 계시는데요. (이 얘기를 들으면 자식으로서는 아주 속상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저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요) 저는 단 한 번도 ‘우리 때는 하고 싶어도 못 했어‘ 같은 말을 들어 보지 못했어요. ‘네가 하고 싶으면 해. 하기 싫으면 매달리지 마!‘ 같은 말은 들어 봤어도요. 아무튼 그 당시에는 대학에 갈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이들이 많지 않았음을 알고 있어요. 그렇기에 부모님의 아쉬움은 이해하지만 부끄러워하시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지혜로운 분들이라서, 더해 자식에게 인생의 교육자가 될 수 있는 부모는 드물어서요. 나는 자식으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며 저무는 청춘으로서 그들을 존경해요.
말을 이어가자면 그 날은 저희 아버지의 신입사원으로서의 첫 출근 날이었어요. 교통정리도 잘 되지 않는 시대였다며 교통이 혼잡했다고 하셨습니다. 그 날 회사 앞에서 교통사고가 일어났대요. 피해자는 아버지의 입사 동기셨고요. 미약한 사고가 아니었기에 신체의 파편들이 널리 흩어졌고,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었어요. 이 소식은 일찍 출근해 사무실에 앉아계시던 아버지의 귀에도 단숨에 들어갔고, 놀란 마음을 달래기도 전에 상부의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그 지시가 무엇이냐 하면, ‘신입사원들은 지금 당장 아래로 내려가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시체를 쓸어 담아라.’입니다. 아버지는 그날 그 시간부로 회사를 그만두고 일용직에 뛰어드셨어요.
그 후 엄마의 출산(언니)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새롭게 자리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고조-증조를 거쳐 지금까지, 한 동네에서 몇 대를 거쳐 이어져 온 가문의 차남으로서 아빠는 다행히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까지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하셔요. 아빠는 회사를 관둔 뒤 택시 운전을 하시다 유류업에 뛰어드셨고, 가정집이나 기업 단지 내 장비와 차량에 기름을 배달하고 납품하시며 언니와 나, 동생의 학비까지 책임지셨어요.
미끈거리고 온몸에 힘을 줘야 하는 아빠의 삶은 낭떠러지 끝의 철봉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위태롭고 무거웠을 것입니다. 사실 많이 무서웠을 거예요. 그러니 저는 세대 차이가 있으니 힘들다는 말도 상대적이라는 점, 공감하지 못합니다. (도시가스에 대해 잘 알고 계시나요? 저는 자세히는 잘 모릅니다. 그 이유인즉슨 너무 당연히 소비해 온 것이라서 그래요. 물도 내 주변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니 ‘물이 대체 뭘까’라고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요. 아무튼 70년대에 처음 보급된 도시가스는 2020년을 기준으로 전국 보급률이 80% 언저리인데, 지금까지도 우리 동네에는 도시가스를 사용하지 않는 가구가 대부분이에요. 아버지께서 그 사업을 선택하신 이유이기도 하죠.)
아버지께서는 힘쓰는 일을 많이 하셔서 그런지 허리가 아프세요. 하지만 그것보다도 그의 허리 통증에는 택시 운전사 시절 일어난 교통사고의 영향이 큽니다. 음주 운전을 한 상대 탓에 아빠는 공터나 운동장에서 홀로 몸을 풀어가며 즐기던 무용도 그만두게 되었고, 추간판 탈출증을 진단받아 허리에 몇 번이고 철심을 박았어요.
진탕 술에 취해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던 24살의 가을 새벽,(잘못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때는 그게 낭만이라고 생각했어요. 죄송합니다.) 가족 단톡방에 며칠 전 찍은 사진을 올리며 ‘자다 깼음’ 같은 말을 보냈던 나의 마음은 왠지 모를 죄책감일수도 있겠어요. 저는 실제로 몇 년간 술을 끊었었는데요. 끊었다기에 사실 많이 즐기지 않았습니다. 인생이 쓸수록 술이 달다는데 아직 제게 술은 많이 쓰거든요. 그렇기에 제게 술이란 그저 부끄러우면서도 사리분별을 흐리게 한다는 것이, 도시의 메아리 같았나봐요.
현재 저희 부모님께서는 고조할아버지께서 지으신 붉은 벽돌집에서 살고 계셔요. 그 집에서 눈을 뜨고 감으며 도보 20초 거리 사무실로 출퇴근하십니다. (잠시 그 벽돌집에 관해 설명하고 싶어요. 내부는 아주 멋진 붉은빛의 나무 자재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거실에는 마당이 한눈에 들어오는 통창, 그리고 연한 베이지색 배경에 초록색 자수가 수놓인 커튼이 달려 있었고요. 거실 벽에는 어머니께서 두 달 동안 만드신 가로 1.5m 정도의 십자수 작품이 걸려 있었어요. 마당의 닭장에서는 아침마다 닭이 울었고 저는 달걀을 꺼내 왔죠. 삐걱거리는 방문을 열고 나와 분홍색 내복을 입은 채로 할아버지 할머니께 큰절과 함께 문안을 올렸어요. 원래라면 옷을 갈아입었어야 했는데 아마 어려서 봐주신 것 같습니다.. 거실로 나오면 왼편에 팔뚝 크기의 이름 모를 물고기부터 작은 열대어들까지, 아쿠아리움으로 소풍을 간대도 설레지 않을 정도로 멋진 수조가 놓여 있었어요) 아직 이렇게 자세히 기억할 정도로 본가는 추억의 창고 같은데, 부모님은 오죽하실까요?
작년에 길게 고향에 내려가 있었어요. 6시에 출근해 20시에 집으로 함께 돌아오며, 뒤돌면 가장 가깝지만 현재는 등지고 있는 그들의 ‘멀고도 가까운 삶’을 함께 보내니 갑갑했던 서울 생활도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환기가 되더라고요. 항상 부모님만 뵙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내가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는 거겠죠. 그런데 요즘은 있잖아요. 제가 나이를 조금 더 먹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고향에 내려가서 쉬고 올라온다는 표현조차 이기적으로 느껴져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이제부터는 이기적으로 내 부모가 많은 사람 중 가장 먼저 행복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살아요.(그렇다고 그들이 현재 불행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냥 마침 우유를 사러 갔더니 원플러스원인 것처럼, 그런 행복이 주변에 만연했으면 좋겠어서요.
그 해 여름에 말이에요. 10개 5,000원인 막대 아이스크림을 20개 사서 집으로 향했는데요. 19개는 엄마 아빠 입맛에 맞춰서 사고 하나는 제 입맛에 맞춰 샀어요. 메로나요. 근데 그날 밤 아빠가 제 메로나를 가져와 드시며 할인중인 <파묘>를 대여해서 같이 보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요. 메로나 대신 주어진 비비빅이라는 선택지에 슬펐지만 어이가 없고 웃겨서 그러자고 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매달 한 번씩 온 가족 다 같이 영화관에 갔었는데요. 아직도 나에게 그 문화가 남아 있는건지 새로운 영화가 개봉하면 보고싶다가도 이상하게 개봉이 끝날 때까지 미루게 되더라고요. 누군가와 함께 보고 싶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이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요. 입을 다물고 위아래 입술을 떼어내면 ‘아빠’, ‘엄마’소리가 나잖아요.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내뱉는 그 단어요. 너무 쉽게 뱉어서 그런지 가끔은 날아가버릴 것 같아 불안해요. 하지만 또 그렇게 나와 함께 유영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건 어떤 마음일까요? 설이라 곧 보긴 하겠지만, 잘 모르겠어요. 그냥 평소보다 많이 보고 싶어요.
진짜 잘 모르겠습니다.
다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