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해서 그런 거예요
취향에 관한 대화는 지루하다. 모두의 취향이 창작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니까, 손발 뇌 저려가며 만든 창작물을 내 취향을 드높이기 위해 이용하면 좀 창피하잖아. 그래서 난 이런저런 걸 좋아한다- 가 끝이다. 이유를 물으면 자전적인 얘기 조금에 공감각 조금.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정도로의 깊은 지식이 없는 탓일 수도 있고, 좋아하는 이유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시무룩해지는 탓일 수도 있다. 뭐든 간에 내가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지루할 일도 없었을 거로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내 탓은 아니다. 더욱이나 상대의 탓도 아니다. 취향은 이해의 영역이 아니니까, 그저 나눔에 의의를 둬야지. 그리고 귀갓길 지하철 구석 자리에서 밝기를 최대로 낮춘 핸드폰 화면, 쥐어짜낸 뇌즙 꼴깍이며 버석거리는 입술, 오타 가득한 검색창 그리고 캡처.
2024년 8월부터 영화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귀엽게도 이름은 고사리클럽. 귀엽다. 나는 고사리 안 좋아한다. 어릴 때 갈색 나물은 초콜릿 맛이 난다던 엄마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한 움큼 입에 쑤셔 넣다 어금니 틈새 사이에 끼어버린 한 줄기가 목젖을 휘감아 토악질을 해댄 기억 때문이다. 지금은 좋아하나? 음식에 섞여 나오면 먹긴 한다만 찾아 먹지는 않는다. 싫어하지 않지만 좋아하지도 않는다. 이 모임의 구성원들은 내게 고사리 같은 존재다. 무슨 맛일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진짜 그 맛이 나긴 할지 의아한 의구심 한 스푼이 감칠맛을 가져오는 어릴 적 초콜릿 나물같은 존재다. 모임은 2주 간격, 격주로 진행된다. 발제자가 선정한 영화를 2주간 감상하고, 다 같이 둘러앉아 발제 문답을 공유한다. 타인의 창작물이 감상의 창작으로 이어지다니 개인적이기도 하지. 내면은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내어 보일 때 훔쳐봐야 하니까, 뭐 좋다. 나쁠 것 없다.
킬링타임용 영화란 뭘까.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 영화를 틀어놓을 리 없고. 배경음악으로 깔아두는 영화일까? 나는 하이틴 영화를 틀어두고 집 청소를 하거나 밥을 먹는다. 그런 영화는 집중해서 감상하기가 힘들다. 여자주인공이 코너를 돌다 남자주인공의 가슴팍에 얼굴을 부딪쳐서 들고 있던 밀크셰이크를 떨어트린다. 가죽 로퍼를 뒤덮은 밀크셰이크를 닦아주려는 여자주인공의 손. 괜찮다며 제지하려는 남자주인공의 손. 그 둘의 손이 맞닿는 순간.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보사노바. 그런 뻔함은 아무래도 견디기 힘들잖아…. (베리 키오건이라면 상관없다.) 그러니 머리보다 대가리를 굴린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음울하고 칼칼한, 운동장의 쇳가루를 모두 모아 끓여도 모자란 Fe 급 영화는 잘만 넘어간다. 입안이 거슬거려야 영화를 봤구나 싶으니까. 내 시간을 죽여주는 영화라니 섹시하잖아.. 킬러가 섹시한 이유도 뭐 그런 거 아닐까. 흠흠.
고사리들을 만난 지 벌써 3개월이 지났다.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100일을 넘겼다니. 내가 생각한 것보다 좋은 사람들이고,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나쁜 사람들이다. 이런 좋은 걸 혼자 보고 있었고, 이런 생각을 혼자만 하고 있었다니. 단단한 바게트와 파르미지아노 치즈로 샌드위치를 만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굉장히 얄밉다. 나는 삶과 사람의 생에 관련된 발제문을 작성했다. 선정한 영화는 <토리노의 말>, <나라야마부시코>, <향기어린악몽>. 가장 좋아하는 영화냐고? 아니다…. 사실 섹스와 윤락이 불가피한 사회, 방탕 주의 영화를 공유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경멸의 눈빛은 견디기 힘들 것 같아 핸들을 꺾었다. 면허도 없는 주제에 핸들을 잡은 탓인지 올라탄 차가 범퍼카인 건지 사고 아닌 사고가 난 듯하다.
그래도 좋은 대화를 많이 나눴다. '좋은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취향에 순위를 매기지 않는 것 같아. 적어도 남보다 못할까봐 괜히 이것저것 끌어와 자랑할 필요가 없었다. 지루한 대화도 없었다. 100을 보여도 1조차 놓치지 않았다. 나는 취향에 위계를 들이미는 이들 앞에서 입을 열지 않는다. 흥건한 침을 삼키느라 정신이 없었대도, 그래도 마찬가지였겠지. 버석거리던 몇 대화에 애도를 표한다. 안절부절못하는 입을 볶으려 몇 만남을 기약했다. 아무렴 괜히 찔려서 말해봤다. 편해서 말을 안 하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