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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빠삐용 Dec 19. 2024

목장에 갔더니
결벽증을 잊어버렸다.

내 침은 싫은데 너희 침은 괜찮아

몇 년 전, 일곱에서 여덟 달 동안 

결벽증에 시달리던 기간이 있었다.


누군가랑 신나게 이야기하다가 

내 입에서 침이 나와 손등에 한 방울 묻으면

무조건 비누와 물로 씻어야 마음이 편했다. 

외출을 해서 비누로 씻을 화장실이 없으면

집에 도착할 때까지

손등이 다른 물건이나 소매에 닿지 않게 버티며 갔다. 


가루가 없고 기름기도 없는 음식이더라도 

손으로 집으면 바로 비누로 빡빡 씻었다. 


가장 힘든 것은 립밤을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입술에 침이 묻어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립밤을 한 번 사용할 때마다

이쑤시개로 한 겹 잘라내어 일회용처럼 썼다. 


'난 평생 이렇게 살아야 되나 보다'하고 

고치려는 의지까지 잃었을 때쯤 

우리 가족은 여행을 가게 되었고, 

양에게 건초를 먹여줄 수 있는 목장에 가기로 했다. 


별생각 없이 목장에 도착해 

건초를 양들에게 먹여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힘센 양들이 약한 양들을 밀치며 건초를 받아먹었고, 

약한 애들은 뒤로 밀쳐지고, 옆으로 밀쳐지며 

거의 먹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이 작은 양들을 책임지고 먹여주겠다는 결심을 하고

건초로 유인해 큰 양을 왼쪽으로 몬 다음

오른쪽으로 잽싸게 달려가서 작은 양들 입에 건초를 쏙 넣어주었다. 


건초를 먹이고 나니 옷에 건초 조각이 잔뜩 묻고

손에 양의 침이 범벅이었는데, 

나는 쿨하게 손바닥을 비벼서 털어내고

마치 결벽증이 없는 사람처럼 하루를 보냈다. 


내 침은 한 방울만 묻어도 비위생적이라는 공포감에 휩싸였었는데, 

양들의 침은 왜 범벅이 되어도 그토록 사랑스러웠을까?

어쩌면 나의 결벽증은 안전에 대한 불신과 

스스로에 대한 사랑 부족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침 한 방울 묻을 때마다 잠옷을 빨지 않아도 마음이 편하고

입술에 내 손이 닿았다고 강박적으로 씻지 않는다.


정확히 어떻게 해결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사랑과 평안이 희미해지던 시기에,

나의 몸이 결벽증이라는 신호로 내게 말을 건 것이 아닐까?


함부로 위로나 응원을 하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만약 비슷한 증상으로 마음고생하는 분이 있으시다면,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결벽증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지실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겠다. 


-안전감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기억하며

빠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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