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ano Man (완)

Old Man In The Bar

by 박경민

3화. Old Man In The Bar


피아노 의자에 다시 앉자, 아까보다 건반이 훨씬 따뜻하게 느껴졌다.

시곗바늘은 밤 1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바 안의 손님들도 하나둘 잔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고개를 들어 바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예전에 영화 시나리오를 쓰다가 지금은 부동산을 운영하는 김사장님과 회사에 다니면서도 틈틈이 습작을 쓰며 작가를 꿈꾸는 경민이 앉은 테이블이 보였다. 영감님은 그 둘을 톰과 제리라고 불렀다. 매일 같이 서로의 문장을 가지고 티격태격하지만, 서로를 의지하는 둘도 없는 친구라고 말이다.

그 옆 테이블에는 삼총사의 모습도 보였다. 한예종 10학번 동기들로 바에 있는 내내 서로를 놀리고 비웃기 바빴지만, 영감님은 그들을 아토스, 아라미스, 포르토스라 부르며 그들에게 자신을 달타냥으로 끼워달라며 호탕하게 웃곤 했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바에 모여있는 이들을 보며 미소를 나누고 있을 때,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온 선희가 피아노 옆에 섰다.

나는 그녀에게 눈짓을 건네고, 건반을 힘차게 내리쳤다. '피아노 맨'의 전주가 전보다 훨씬 경쾌하고 당당하게 울려 퍼졌다.

“Sing us a song, you're the piano man!”

“Sing us a song tonight”

선희가 가장 먼저 목소리를 높였다.

잔을 들고 있던 손들이 공중에서 잠시 멈췄다.

누군가는 놀란 눈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누군가는 입을 벌린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Well, we're all in the mood for a melody”

“And you've got us feeling alright”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숨죽인 바텐더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시작한 배우의 발성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춰 바 안에 있던 모든 부서진 영혼들이 입을 모으기 시작했다.

“La la la, de de da”

“La la, de de da da da”

노래는 모두의 합창이 되었고, 후렴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누군가는 박자를 놓쳤고, 누군가는 음을 틀렸지만, 그럼에도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창밖에는 차가운 밤공기가 흐르고 있었지만 낡은 바 안은 마치 오래된 축제처럼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합창이 거세질수록 건반 위의 내 손가락이 이상할 정도로 가벼워졌다. 잘 치려는 생각도, 틀리지 않으려는 계산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나는 내가 변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손보다 먼저 가슴 안에서 무언가가 풀어지고 있는 느낌. 오래 굳어 있던 것, 이름 붙이지 못했던 덩어리가 이유 없이 녹아내렸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는데, 이제는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어릴 적, 해가 질 때까지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놀다가 친구들과 마주 보고 아무 이유 없이 한참을 웃고 나면 몸이 텅 비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해지던 그 순간처럼.


"자네, 혹시 빌리 조엘의 '피아노 맨'을 칠 줄 아나? 왠지 자네가 쳐주는 그 노래가 듣고 싶군. 이 바에는 항상 무언가 하나가 부족했거든. 사람들의 흩어진 고독을 하나로 묶어줄 '소리' 말이야."


처음 만난 날, 영감님이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더 세게 치지 않았다.

더 멋지게 연주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 밤에 남아 있는 감정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건반 위로 흘러나오는 소리들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거짓도 아니었다. 그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의 숨결과 같은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연주가 끝났을 때 바 안에는 잠시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리고 곧 웃음과 박수와 잔 부딪히는 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부서지고 꺾여버린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있을 거야.”


영감님이 말한 문장의 뜻을 이제 완벽하게 이해할 것 같았다. 나는 건반 위에 손을 올린 채 조용히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이제야 연주를 피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제야 다시 무대에 앉아도 되겠다고.

피아노 앞에서 도망치지 않아도 될 만큼 내 안이

조금은 따뜻해졌다는 걸 이 밤에 처음으로 느끼고 있었다.




새벽이 되자 바에는 점점 빈 자리가 늘었다.

마지막 손님이 문을 나서고 문종이 한 번 짧게 울린 뒤 바 안은 다시 낮은 숨소리 같은 정적만이 남았다.

선희는 말없이 바 안쪽으로 돌아가 잔에 얼음을 채웠다. 진과 토닉을 따르자 얼음이 녹아내리며 잔에 부딪히는 ‘달그락’ 소리가 났다. 조용한 바에서 그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그녀는 완성된 잔을 조심스럽게 들어 꽃다발이 놓인 영감님 자리 앞에 올려두었다.

늘 그가 앉던 자리, 늘 같은 각도로 팔꿈치를 올리던 곳.

“한 잔 하세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그녀가 짧게 말했다.

불을 하나둘 끄고 바의 문을 잠갔다.

문을 닫는 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길게 울렸다.

밖에는 밤공기가 서늘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바 앞에는 피아노 맨이 서 있었다.

그는 잠시 말이 없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도…

이제 여기서 연주 안 하려고.”

선희가 고개를 들었다.

“이 바에서는 충분히 연주한 것 같아.”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도망치듯 가볍지는 않았다.

“다시 시작해 보려고. 피아노를.”

선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아주 작게 웃었다.

“잘 어울리네.”

“응원해 줄 거야?”

“그럼.”

선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는 다를지 몰라도

연주하는 이유는 같을 거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로에게 더 묻지 않았다.

언제 다시 만날지, 어디서 만날지 같은 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볍게 손을 흔들며

각자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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